바이오스펙테이터 천승현 기자
지난 2012년 대대적인 약가제도 개편 이후 국내 처방의약품 시장 판도가 요동을 쳤다. 국내 상위제약사들이 집단 부진에 빠진 반면 중소제약사와 다국적제약사는 성장세를 나타냈다. 리베이트 규제와 새로운 약가제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영업력으로 외형을 확대한 제약사들의 입지가 위축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6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국회에 제출한 의약품 처방실적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1년 기준 국내제약사 상위 50곳의 처방실적은 7조650억원에서 지난해 6조6292억원으로 6.2% 줄었다.
지난 2012년 약가제도 개편 이후 국내 처방의약품 시장의 판도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 2011년과 2015년의 처방실적을 비교했다. 이와 관련 보건복지부는 지난 2012년부터 약가제도 개편을 통해 특허만료 의약품의 가격을 특허만료 전의 80%에서 53.55%로 내렸다. 제네릭의 가격 기준도 특허 전 오리지널 가격의 64%에서 53.55%로 떨어졌다.
복지부는 2012년 4월 기존에 판매 중인 의약품에도 새 약가제도 기준을 적용하는 일괄 약가인하를 단행했다. 이때 건강보험 의약품의 가격이 평균 14% 인하됐다. 당시 건강보험 적용을 받는 의약품 1만3814개 중 6506개 품목이 약가가 깎였다.
◇국내 상위제약사 처방실적 급감ㆍ중소제약사 '상승'
지난 4년간 제약사들의 처방실적 추이를 보면 3가지 변화가 발견된다. 국내 상위제약사들의 처방실적이 전반적으로 줄어든반면 중위권 제약사들은 상승세를 나타났다. 약가인하에도 불구하고 다국적제약사의 처방실적이 늘었다는 점도 예측되지 않았던 현상이다.
약가인하 이후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국내 상위제약사들의 처방실적이 큰 폭으로 곤두박질쳤다는 점이다. 대웅제약, 동아에스티, 한미약품 등 상위 10개 업체의 처방실적은 2011년 3조4489억원에서 지난해 3조274억원으로 12.2% 줄었다. 상위 20개 업체로 확장해도 처방실적은 10.3% 감소세를 나타냈다.
한독의 처방실적이 3760억원에서 2422억원으로 35.6% 줄었고, 동아에스티(-34.2%), 유한양행(-23.4%), 신풍제약(-23.1), 제일약품(-21.3), 부광약품(-20.6%) 등의 인하 폭이 컸다. 동화약품의 처방실적은 무려 67.3% 감소했다. 상위제약사 중에는 종근당만이 두 자리수(17.9%) 증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중위권 제약사들의 처방실적을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2011년 기준 국내제약사 21위부터 50위까지 제약사들의 처방실적은 2조1384억원에서 지난해 2조2122억원으로 3.5% 늘었다.
안국약품(23.6%), 대원제약(46.2%), 경동제약(23.6%), LG생명과학(53.4%), 명인제약(34.9%) 등 두 자리수 상승세를 기록한 업체가 14곳에 달했다. 상위제약사들이 집단 부진을 겪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다국적제약사들의 처방실적도 상승 흐름을 보였다. 2011년 기준 다국적제약사 상위 20곳의 처방실적은 3조6557억원에서 지난해 3조8976억원으로 6.6% 증가했다. 한국MSD(15.5%), 한국아스트라제네카(18.7%), 한국로슈(26.6) 등 7개사가 10% 이상 성장했다. 한국베링거인겔하임은 4년새 처방실적이 87.9% 뛰었다.
종합하면 국내 상위제약사만 전반적으로 고전을 나타냈을 뿐, 국내 중소형제약사와 다국적제약사는 성장세를 보인 것이다.
통상 노인인구와 만성질환자의 증가로 의약품 사용량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국내제약사들의 집단 처방실적 부진은 극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실제로 2012년 대대적인 약가인하에도 불구하고 건강보험 약품비는 2011년 13조4290억원에서 지난해 14조986억원으로 소폭 증가했다.
◇'보유 의약품도 대동소이'..리베이트 규제로 평준화 현상
전문가들은 영업현장과 약가제도 환경 변화로 제약사들의 처방실적 판도가 요동친 것으로 분석한다.
우선 처방현장에서 강력한 리베이트 규제로 국내 상위제약사들의 처방실적이 줄어든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 몇 년간 정부는 강력한 의약품 리베이트 규제를 가동했다. 리베이트를 주고받는 자를 모두 형사처벌하는 쌍벌제가 2010년부터 시행됐고, 2014년에는 리베이트로 적발된 의약품은 건강보험 적용을 중단하는 처벌 기준도 신설됐다. 리베이트 의약품의 판매금지 기간도 1개월에서 3개월로 확대됐다. 제약사들이 2000년대 초반과 같이 적극적으로 영업을 펼칠 수 없는 환경이다.
이종혁 호서대 제약공학과 교수는 “2000년 의약분업 이후 약물 사용량이 급증하면서 강력한 영업력을 갖춘 제약사들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면서 “리베이트 규제 강화 이후 제약사들이 적극적인 영업활동을 펼치지 못하면서 처방의약품 시장도 업체별 평준화 현상이 두드러졌다”고 분석했다.
이 논리는 국내 상위제약사와 중소제약사간 보유한 의약품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데에서 기반한다. 상위제약사들이 2000년 이후 괄목할만한 성장을 나타냈지만 주로 제네릭 영역에서 매출을 끌어올렸다. 국내제약사가 개발한 신약의 생산실적은 지난해 1587억원으로 전체 시장 규모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제약사들이 유사한 의약품을 보유한 상황에서 영업력도 큰 차이가 없다면 처방실적도 업체간 편차가 줄어드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건강보험에 등재된 의약품 개수를 보면 제약사들간 차이가 크지 않았다. 지난 7월1일 기준 한미약품이 473개로 가장 많은 건강보험 의약품을 보유한 가운데 JW중외제약(389개), 종근당(372개), 신풍제약(357개), 한림제약(287개) 등이 뒤를 이었다. 대한약품, 하나제약, 명문제약, 태준제약 등 중소제약사들도 200개 이상의 건강보험 의약품을 등재한 상태다.
국산신약과 개량신약이 많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면 일부 업체를 제외하고 상당수 제약사들이 유사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 향후 제약사들의 처방실적 평준화 현상이 더욱 두드러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오리지널ㆍ복제약 동일 가격으로 다국적제약사 처방실적 상승
다국적제약사의 처방실적 증가는 국내제약사에 비해 우수 신약을 많이 배출했다는 사실 이외에도 약가제도 변화로 반사이익을 얻은 결과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지난 2012년 개편된 약가인하 제도의 핵심은 특허가 만료된 오리지널 의약품과 제네릭의 가격을 동일한 수준으로 책정한다는 내용이다. 보험약가가 100원인 오리지널 의약품은 특허가 만료되면 최종적으로 53.55원으로 떨어진다. 제네릭도 오리지널과 똑같은 53.55원까지 받을 수 있다. 기존에는 제네릭 의약품의 약가는 오리지널의 80% 넘지 못하도록 제한됐다.
과거에는 신약의 특허가 만료돼 제네릭 제품들이 시장에 진입하면 신약의 매출은 급감하는 패턴이 반복됐지만 최근에는 제네릭 등장 이후에도 처방량이 줄어들지 않는 신약도 종종 발견된다.
화이자의 고지혈증약 ‘리피토10mg’은 2011년 처방실적 721억원에서 지난해 762억원으로 4년새 5.7% 늘었다. 하지만 보험약가가 917원에서 662원으로 떨어진 것을 감안하면 처방량은 7863만개에서 1억1511만개로 46.2% 늘었다. 리피토10mg의 제네릭이 102개 등재됐는데도 도리어 매출은 증가하는 기현상이 펼쳐진 셈이다.
제네릭 102개의 보험약가를 살펴보면 78개 제품이 리피토(662원)와 유사한 660~663원으로 약가가 책정됐다. 98개 제품이 600원 이상의 약가를 받았다. 제네릭 제품이 오리지널에 비해 가격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국내제약사 한 영업본부장은 “리베이트 규제로 영업활동이 위축된 상황에서 오리지널 의약품과 제네릭의 가격이 똑같은데, 의료진 입장에선 오리지널을 처방하는 게 당연한 이치다”라고 토로했다.
국내제약사들이 다국적제약사 신약 판매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다국적제약사의 매출 증가에 기여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 처방실적 1위 ‘바라크루드’와 2위 ‘비리어드’를 포함해 품목별 처방실적 상위 20개 품목 중 9개 품목은 국내업체가 공동으로 판매를 진행 중이다.
지난 2013년 국내제약사 중 처음으로 매출 1조원의 돌파한 유한양행은 2011년 이후 처방실적이 오히려 23.4% 뒷걸음질쳤다. 유한양행은 베링거인겔하임의 고혈압약 ‘트윈스타’와 당뇨약 ‘트라젠타’를 판매하며 대형 제품으로 육성한 결과 베링거인겔하임의 처방실적은 같은 기간 무려 87.9% 뛰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다국적제약사가 국내사에 비해 제품력이 뛰어난 신약을 많이 배출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처방실적의 다국적제약사 쏠림현상은 가중될 수 밖에 없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