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스펙테이터 천승현 기자
‘혁신(革新)’이라는 단어는 '가죽(革)을 벗겨 새롭게(新)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국어사전을 보면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꿔서 새롭게 함’이라고 정의된다. 세상을 바꿀만한 발명품 정도 돼야 혁신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는 얘기다.
흔히 ‘혁신 신약’은 기존에 치료가 불가능했던 질환을 치료하는 약물 또는 기존치료제보다 효능이 월등히 우수한 신약을 통칭한다. 혁신 제약사라고 하면 혁신 신약을 만들어 인류 삶의 질 개선에 기여한 제약기업으로 추측할 수 있다.
국내에는 혁신형제약사를 정부가 지정해주는 특이한 제도가 있다. 열심히 연구개발(R&D) 하는 업체에 다양한 혜택을 제공, 신약개발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겠다는 의도다. 2011년 제약산업육성·지원 특별법이 공포되면서 이 제도의 근거가 마련됐다.
R&D 투자금액, 신약 성과 등을 통해 혁신형제약기업으로 인증받으면 약가우대, R&D 우대, 세제 지원 등의 혜택이 주어지는데, 제약사들이 체감하는 가장 큰 지원은 약가우대다. 당장 눈 앞의 수익 증대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당초 이 제도를 시작할 때 약가우대 혜택은 복제약 가격을 1년 동안 다소 높게 책정해주는 게 유일했다.
복지부는 최근 혁신신약의 가격을 높게 책정해주는 내용을 포함한 약가제도 개선안을 발표하면서 수혜 대상은 대부분 혁신형제약기업으로 한정했다. 그렇다보니 혁신형제약기업에 부여하는 약가 우대 정책도 숫자상으로는 크게 늘었다.
예를 들어 혁신형제약기업이 국내에서 세계 최초로 허가받은 신약을 배출하면 약가협상시 종전보다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도록 했고, 판매량이 많을 때 약값을 깎는 사용량 약가연동제라는 약가 사후관리도 피해갈 수 있는 장치도 마련됐다.
바이오시밀러의 보험약가 우대도 혁신형제약기업이 개발해야 받을 수 있다. 실질적으로 약가우대를 받는 대상이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 정도면 정부가 어떻게든 혁신형제약기업을 지원해주겠다는 진정성은 의심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혁신형제약기업 인증 제도가 국내 제약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대표적인 당근책이지만 정작 제약업체들 사이에서 실효성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보건복지부가 이번에 추가 인증한 4개 업체를 포함해 총 46곳이 혁신형제약기업으로 지정된 상태다. 사실상 신약개발에 관심이 있는 제약사들은 대부분 혁신형제약기업으로 인증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혁신형제약기업이 아니면 어디 가서 명함도 내밀지 말라는 분위기다.
혁신형제약기업에 주어지는 혜택이 불편한 까닭은 국민들이 내는 건보료로 정부가 생색을 내고 있다는 인상 때문이다. 제약사들에 약값을 높게 책정해주면 그만큼 건강보험재정 부담도 가중될 수 밖에 없다.
일부 바이오업체의 요구로 이번에 수용된 바이오시밀러 약가 산정기준 상향 조정이 대표적인 사례다. 바이오시밀러의 약가가 올라가면 기존에 팔리던 오리지널의 가격도 비싸지는데, 바이오시밀러의 진출이 임박한 ‘허셉틴’, ‘란투스’ 등 대형 제품의 가격인상 효과로 건강보험 재정은 매년 막대한 추가 지출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더구나 이 혜택은 다국적제약사들에 돌아가기 때문에 국내 제약산업 육성과도 거리가 멀다.
복지부는 이번에 약가제도 개선 정책을 결정하면서 건강보험 재정의 추가 부담 또는 절감 효과에 대해 예측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약가제도 개선을 논의할 때 다국적제약사들이 물밑에서 치밀한 로비를 펼쳐 정작 국내업체보다 다국적제약사들이 수혜를 입는 정책이 관철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오는 배경이다.
업계에서는 ”혁신형제약기업 인증 제도는 정부가 향후 약가제도 등 정책을 추진할 때 혁신형제약기업만 파트너로 상대하겠다는 의도와 다름 없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실제로 수많은 다국적제약사들이 한국 정부로부터 혁신형제약기업 인증을 받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혁신형제약기업의 지원 정책이 얼마나 변질됐는지 알 수 있다. 이미 다국적제약사 대부분은 오래 전 국내에서 공장을 철수했고, 영업인력마저 점차적으로 줄이는 추세다. 한국에서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이유는 한국에서 약을 팔기 위한 필수 절차일 뿐이다. 국내에서 활동 중인 다국적제약사들은 우리 정부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혁신제약사라는 타이틀을 딴 업체들이다.
언제부턴가 혁신형제약기업의 R&D 성과는 정부의 성과로 둔갑했다. 복지부는 최근 혁신형제약기업의 성과 자료를 발표하면서 국내 상장 제약사 매출액 중 혁신형제약기업의 매출이 56.0%에 달한다고 보고했다. 애초부터 매출액이 많은 기업들을 혁신형제약사로 선정해놓고 이들 업체의 매출이 많다고 성과로 포장하는 모양새다. 최근 한미약품의 신약수출과 같이 제약사의 신약성과가 발표될 때마다 정부는 “R&D 지원의 성과가 나타났다”며 은근슬쩍 숟가락을 얹는 일을 반복해왔다. 혁신형제약기업들은 정부 정책의 성과를 포장하기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마저 제기된다.
복지부는 지난 2012년 혁신형제약기업 43곳을 선정하면서 ‘제약산업을 미래성장산업으로 탈바꿈시킬 주역’이라는 표현을 썼다. 정부 지원 없이도 활발한 R&D 성과를 내는 업체가 이미 곳곳에 포진해 있는데도 정부는 마치 제약사들을 걸음마 단계를 막 지난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 인상이다.
혁신형제약기업 인증 제도가 가져온 변화는 분명 있다. 국내 기업들 사이에선 혁신형제약기업 인증을 받지 못하거나 인증이 취소됐을 때 닥칠 수치심 때문에라도 이 타이틀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제도가 '제약사 줄 세우기'로 전락했다는 비판마저 나오는 이유다. 정부 정책 성과를 포장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진정한 '혁신'이라는 단어에 어울릴만한 현실적인 지원 정책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