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스펙테이터 천승현 기자
다국적제약사는 복제약(제네릭)으로부터 시장을 방어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제네릭의 시장진입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후속특허를 잇따라 등록하며 제네릭 발매에 제동을 거는 전략이 다반사다.
최근에는 오리지널 의약품의 포장만 바꾼 제네릭을 하나 더 내놓으며 시장 방어 체계를 두텁게 쌓는 경우도 눈에 띈다. 같은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상품명만 바꿔 다른 업체에 대신 팔도록 위임하는 전략이다. ‘위임제네릭’(Authorized Generic)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유형의 제네릭은 2000년대 이후 미국에서 빠르게 증가한 제네릭 방어 전략이다. 국내에서 위임제네릭은 어떤 효과를 발휘할까.
12일 의약품 조사업체 유비스트의 원외 처방실적 자료를 보면 국내에서 시판 중인 주요 위임제네릭 중 일부 제품만 뚜렷한 성과를 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MSD의 천식치료제 ‘싱귤레어’ 제네릭 시장에서는 CJ헬스케어의 ‘루케어’가 상반기에 66억원의 원외 처방실적으로 선두에 올랐다. 한미약품의 ‘몬테잘’(30억원)을 여유있게 제치고 제네릭 1위 자리를 유지 중이다. 루케어는 싱귤레어의 상품명만 바꾼 위임제네릭이다. CJ헬스케어가 허가받았지만 포장을 벗겨내면 싱귤레어와 똑같은 제품이다. 루케어는 MSD와 CJ헬스케어의 합의 하에 싱귤레어의 특허만료 6개월 전인 지난 2011년 7월 발매됐다. 지난해에는 130억원어치 처방되며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했다.
연간 500억원 규모의 시장을 형성하는 위장약 ‘알비스’도 위임제네릭이 제네릭 시장에서 선두를 지키고 있다. 알비스는 대웅제약이 자체개발한 개량신약이다. 대웅제약은 계열사를 활용해 위임제네릭을 내놓았다. 계열사 대웅바이오와 알피코프(2015년 12월 계열 분리)가 판매 중인 ‘라비수’와 ‘가제트’가 알비스의 위임제네릭이다. 라비수와 가제트 모두 제네릭 제품보다 6개월 먼저 출시됐고 전체 60개의 제네릭 중 올 상반기에 나란히 매출 1, 2위에 랭크됐다.
아스트라제네카의 고지혈증치료제 ‘크레스토’ 제네릭 시장에서도 90여개의 제네릭 중 위임제네릭이 가장 많은 매출을 기록 중이다. CJ헬스케어가 판매 중인 크레스토의 쌍둥이 제품 ‘비바코’는 상반기 84억원의 원외 처방실적을 올리며 일동제약, 삼진제약 등 경쟁 제품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싱귤레어, 알비스, 크레스토 등의 시장만 살펴보면 위임제네릭이 시장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기존에 제네릭 시장에 강점을 갖지 않은 업체가 판매했는데도 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는 점이 그 근거다.
위임제네릭의 성공 요인으로는 두 가지가 꼽힌다. 싱귤레어, 알비스의 사례처럼 경쟁 제품보다 먼저 시장에 진입하면 빠른 시일내 점유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위임제네릭이 후발주자의 시장진입을 저지하려는 불공정행위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지만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법원에서는 위임제네릭의 시판이 합법이라고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또 오리지널 의약품과 같은 제품이라는 사실도 의료인들에게는 매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상품명은 다르지만 오랫동안 오리지널 업체가 만들어 안전성과 효과를 입증한 똑같은 제품이라는 장점이 시장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임제네릭이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다이이찌산쿄, 노바티스, 건일제약 등은 간판 제품의 특허만료와 함께 위임제네릭 카드를 꺼냈지만 아직까지는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이다.
다이이찌산쿄가 개발하고 대웅제약이 판매 중인 고혈압치료제 ‘올메텍’의 경우 다이이찌산쿄가 허가받은 위임제네릭 ‘올메엑트’를 CJ헬스케어가 판매 중이다. 그러나 올매엑트는 상반기 원외 처방실적은 3억5500만원으로 70여개 제네릭 중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다이이찌산쿄는 2개의 성분으로 구성된 고혈압복합제 ‘세비카’도 위임제네릭 전략을 구사했다. 컨설팅업체 사이넥스가 세비카의 포장만 바꿔 ‘세비액트’를 허가받았고, 이 제품은 CJ헬스케어가 판매한다. 다이이찌산쿄가 공급하는 위임 제네릭이 사이넥스라는 업체의 이름을 달고 CJ헬스케어가 판매하는 복잡한 구조다. 세비액트의 올 상반기 원외 처방실적은 4억원에 불과했다.
노바티스도 자회사 산도스를 통해 고혈압복합제 ‘엑스포지’의 위임제네릭 ‘임프리다’를 허가받고 진양제약이 팔도록 했지만 많은 매출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임프리다의 상반기 원외 처방실적은 8억원으로 제네릭 제품 선두권과 격차가 크다.
건일제약도 간판 제품 ‘오마코’의 특허가 만료되자 계열사 펜믹스가 오마코의 쌍둥이 제품 ‘시코’를 허가받았다. 이 제품은 제일약품이 판매에 나섰지만 영진약품이 내놓은 제네릭에 밀리고 있다.
아직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한 위임제네릭은 다른 제네릭과 발매 시기가 같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리지널 업체가 만들었더라도 수십개의 똑같은 제품이 경쟁하는 시장에서 발매 시기마저 같다면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시판 허가를 제네릭 제품은 생산업체가 달라도 과학적으로도 모두 똑같은 품질을 갖고 있다는 게 보건당국의 시각이다.
위임제네릭이 시장에서 성공했더라도 오리지널 업체의 배만 불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가장 성공한 위임제네릭으로 평가받는 CJ헬스케어 ‘루케어’의 경우 MSD가 지난달 판권 계약을 해지했다. 돌연 간판 제품이 사라진 CJ헬스케어는 이달부터 같은 성분의 제네릭 ‘루키오’의 판매에 나섰다.
제네릭 업체들이 위임제네릭에 대해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 이유다. 제약사 한 관계자는 “위임 제네릭 전략은 다국적 제약사가 국내업체를 활용해 시장을 지키려는 꼼수에 불과하다”면서 “과학적으로 똑같은 제네릭 제품인데도 국내업체들이 오리지널 업체가 만든 제네릭 판권을 따내려는 풍토도 문제로 지적된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