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스펙테이터 천승현 기자
국내제약사들이 험난한 미국 시장 도전기를 겪고 있다.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을 두드리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장을 내밀지만 시장 진입 문 턱에서 좌절을 겪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장 관문을 통과했더라도 성공에 근접한 신약도 아직 등장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미국 임상시험 중 중단ㆍFDA 승인 지연 등 속출
지난 13일 녹십자는 미국에서 임상3상시험 중인 유전자 재조합 A형 혈우병 치료제 ‘그린진에프’의 미국 임상을 중단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지난 2012년 임상3상시험에 진입한지 4년 만에 내린 중단 결정이다.
녹십자 측은 “미국 임상 기간을 당초 2~3년 정도로 예상했지만 희귀질환의 특성상 신규 환자 모집이 더디게 진행돼 임상이 계획보다 지연됐다”면서 “투자비용 증가와 출시 지연에 따른 사업성 저하로 이어지기 때문에 미국 임상을 더 이상 강행하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지난 2010년 녹십자는 미국 바이오의약품 유통기업 ASD 헬스케어와 총 4억8000만달러 규모의 `아이비글로불린에스엔`과 `그린진에프`의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임상시험 기간이 당초 계획보다 지연되자 지난해 9월 ASD헬스케어와의 양해각서도 해지됐다.
그린진에프의 미국 임상시험 중단은 상업적 성공 확률이 떨어질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고민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미국 시장에는 바이오젠의 ‘엘로케이트’, 박스앨타의 ‘애디노베이트’ 등 기존 치료제보다 약효 지속 효과가 1.5배 이상 늘어난 후속 약물이 등장한 상태다.
혈우병이라는 희귀질환 특성상 환자 수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후속 약물의 등장으로 환자 모집에 난항을 겪을 수 밖에 없고 성공적으로 임상시험을 종료했더라도 상업성을 낙관할 수 없게 됐다. 녹십자는 그린진에프의 임상시험 대상 환자 중 절반 가량만 모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린진에프의 미국 임상시험에는 수백억원이 투입됐지만 상업적 성공이 불확실한 투자는 중단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린 셈이다.
녹십자 관계자는 “경쟁 약물보다 최대 2배(기존약물 대비 3배) 지속되는 혈우병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개발 속도를 끌어 올려 미국 시장에 재도전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사실 국산 신약의 미국 시장 도전은 성공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실패의 연속이었다.
동아에스티가 개발한 발기부전치료제 ‘유데나필(상품명 자이데나)’은 지난 2011년 미국 임상시험을 마무리하고도 아직 시장에 진입하지 못했다. 유데나필은 국내 바이오업체 메지온이 미국 시장 진출을 추진 중이다.
당초 악타비스가 유데나필의 기술을 이전받고 미국 및 캐나다 시장 진출을 추진했지만 지난해 3월 기술이전 계약이 해지되면서 메지온이 사용권 등 관련 권리를 돌려받았다.
메지온은 지난해 1월 FDA에 유데나필의 신약 허가 신청을 제출했지만 지난해 말 유데나필을 생산하는 인도 닥터레디 생산공장의 품질관리 수준을 개선하라는 경고장을 받고 승인이 보류됐다. 이후 FDA로 부터 지적받은 품질관리 문제가 해소됐지만 최종적으로 FDA로부터 닥터레디 공장에 대한 재점검 결과 문제가 없다는 점이 확인받아야만 유데나필의 허가가 가능할 전망이다.
제약사들이 미국 시장 진출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다국적제약사에 기술 이전을 한 신약들도 번번이 문 턱에서 좌절을 겪기도 한다.
한미약품은 지난해 베링거인겔하임으로부터 5000만달러(약 550억원)을 받고 항암제 ‘올무티닙’의 기술을 넘겼지만 최근 권리가 반환됐다. 올무티닙의 경쟁 약물로 평가되는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보다 개발 속도가 느리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베링거인겔하임이 최근 오스트리아 바이오업체 바이라 테라퓨틱스로부터 차세대 항암 기술을 사들였다는 점도 올무티닙의 개발 중단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일양약품이 한미약품과 유사한 사례를 겪은 적이 있다. 일양약품은 진난 2008년 소화성궤양치료제 ‘놀텍’의 미국 임상을 주도하던 탭(TAP)사가 임상3상 진입단계에서 포기를 선언하면서 미국 진출이 무산됐다. 당시 일양약품은 TAP사를 인수한 다케다가 ‘놀텍’의 경쟁약물을 보유하고 있어 놀텍을 개발을 중단했을 것이란 의혹을 제기됐다. 놀텍은 아직도 미국 시장을 두드리지 못하고 있다.
부광약품은 2009년 B형간염치료제 ‘레보비르’를 미국에 수출했지만 제휴 업체인 파마셋이 레보비르의 임상3상 진행 과정에서 근육병 부작용이 나타났다는 이유로 돌연 임상을 중단했다. LG생명과학은 길리어드에 수출한 C형 간염치료제는 부작용을 이유로 임상시험이 중단된 경험이 있다.
FDA 승인 받아도 산 넘어 산..셀트리온ㆍ한미약품 등 시험대
우여곡절 끝에 미국 시장에 진입했더라도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국산신약 최초로 FDA 허가를 받은 LG생명과학의 ‘팩티브’는 제휴 파트너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이 돌연 임상데이터를 문제삼고 손을 떼면서 해외 진출에 차질이 빚어졌다. 팩티브 개발에는 3000억원 이상이 투입됐지만 미국에서의 판매량은 미미한 수준이다.
한미약품이 자체개발한 항궤양제 ‘에소메졸’은 지난 2013년 국산 개량신약 중 최초로 미국 허가를 받았다. 에소메졸은 아스트라제네카와의 특허소송을 거치며 어렵게 미국에서 발매하는데 성공했지만 시장 반응은 냉담했다. 값싼 복제약(제네릭)과 경쟁해야 하는 한계를 체감한 채 미국 시장 진출 경험을 얻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동아에스티가 개발해 지난 2007년 기술 수출한 슈퍼박테리아 ‘항생제’는 지난 2014년 FDA 승인을 받았지만 아직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가다.
업계에서는 미국 시장을 두드리는 제약사들이 점차 늘고 있어 시행착오가 해소되고 시장이 요구하는 제품을 내놓으면 조만간 성과가 도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셀트리온의 항체 바이오시밀러 ‘램시마’가 미국 시장에서 본격적인 상업적 성공 시험대에 오른다. 류마티스관절염치료제 ‘레미케이드’와 같은 성분의 램시마는 지난 4월 항체 바이오시밀러 중 처음으로 ‘인플렉트라’라는 상품명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고 발매를 준비 중이다. 셀트리온 측은 유럽 시장에서 램시마가 검증됐다는 자신감을 근거로 미국 시장에서의 성공을 낙관한다. 램시마의 미국 판매 파트너가 글로벌제약사 화이자라는 점도 긍정적인 요인이다.
한미약품은 이번에 베링거인겔하임으로부터 권리를 반환받은 올무티닙 이외에도 8건의 대형 기술수출 신약이 남아있다. 물론 8건 모두 상업화 단계 진입이나 상업적 성공을 낙관할 수는 없지만 국내제약사 중 미국 시장 성공 확률은 여전히 가장 높다.
녹십자는 이번에 그린진에프의 미국 임상시험은 중단했지만 녹십자는 지난해 말 FDA에 면역글로불린 아이비글로불린-에스엔(IVIG-SN)의 허가를 신청, 이르면 올해 말 승인이 예상된다. IVIG-SN은 선천성 면역결핍증, 면역성 혈소판 감소증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 녹십자의 간판 혈액분획제제 중 하나다.
대웅제약은 제네릭 제품으로 미국 시장에 뛰어들었다. 올해 초 국내 업체 중 처음으로 항생제 제네릭 ‘메로페넴’의 시판 허가를 받고 판매를 준비 중이다.
이밖에 바이로메드(당뇨병성신경병증치료제), 종근당(비만치료제), 메디톡스(보툴리눔톡신제제), 동아에스티(당뇨병성신경병증치료제-천연물신약), 코오롱생명과학(퇴행성관절염치료제), 대웅제약(보툴리눔톡신제제) 등이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 시장 진출을 목적으로 직접 임상시험을 진행하거나 파트너사를 통해 임상시험을 전개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