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스펙테이터 서일 기자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이다. 의사가 되기 전 외우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학의 신들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때 나오는 의학과 의술의 신이 아폴론과 그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다. 의료와 관계된 아이콘으로 쓰이는 뱀도 아스클레피오스가 환자를 치료할 때 뱀의 도움을 받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의술은 너무 대단해, 때로 죽은 사람을 살려냈다고 한다. 사람의 삶과 죽음은 신의 영역이다. 그런데 죽은 사람을 살려냈으니 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었고, 의사 아스클레피오스는 신들의 노여움을 샀다. 결국 제우스 신은 아스클레피오스의 목숨을 빼앗았지만, 그의 재주와 기술을 아깝게 여겨 나중에 아스클레피오스를 의술의 신으로 삼았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괴물 고르곤의 피로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살아있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다고 한다. 피를 주고받는 의료 행위인 수혈(輸血, blood transfusion)은 죽어가던 사람을 살려낼 수도 멀쩡하던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 신화는 오늘날 의료현장에서 과학이 되었다. 지금은 수혈의학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수혈의 원리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대량출혈은 곧 죽음을 뜻했으니, 인류가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난 것도 사실 최근의 일이다.
이 책은 의료현장에서 수혈을 실행하고, 연구실에서 수혈을 연구하는 이들을 위해 쓰인 '필드 매뉴얼(field manual)'이다. 원래 필드 매뉴얼은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들만 모아놓은 것이다.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의료현장도 전쟁터와 다름없다. 따라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한 야전교범, 즉 필드매뉴얼이 필요하다. 한편 연구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수혈을 연구하는 현장을 위한 가이드북도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수혈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이 책을 작성했다. 꼭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그러나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의료현장과 연구현장을 위한 필드 매뉴얼이다.
수혈 필드 매뉴얼
책은 혈액형과 수혈 일반, 임상적으로 의미가 있는 희귀혈액형에 대한 정보, 비예기항체 검사나 장기이식 등 수혈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꼭 알아야 할 것들을 교과서적 정보와 국가수혈가이드라인을 기준으로 정리했다. 쓸모있는 필드 매뉴얼이 되려면 이론뿐만 아니라 현장 경험이 빠져서는 안 된다. 수혈을 담당해온 의사인 저자가 현장 독자들을 위해 직접 또는 간접으로 경험했던 사례 가운데 현장에서 참고할 수 있을 것들을 골라 소개하고 해설을 덧붙였다.
Rh(D) 음성 혈액형은 한국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희귀혈액형이다. 책은 Rh(D) 음성 혈액형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여러문제, Rh(D) 음성 혈액형의 안전한 수혈, 응급상황에서의 대처 가이드라인을 담았다. 또한 Rh(D) 음성 혈액형으로 판정되기 쉽지만 실제로는 Rh(D) 변이형인 아시아형 델(DEL) 혈액형에 대한 최신 연구내용도 소개한다.
Rh(D) 음성인 여성의 임신과 출산과 관련된 문제도 빠뜨릴 수 없다. 한국은 Rh(D) 음성 임산부에 대한 관리가 잘 되고있는 편이지만, Rh(D) 음성 혈액형인 여성이 Rh(D) 양성인 아이를 임신했을 때 태아의 건강을 걱정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책은 Rh(D) 음성인 여성이 Rh(D) 양성인 아이를 가졌을 때의 사례 또한 수혈로 안전하게 관리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책에는 저자가 연구했던 수혈과 혈액형에 대한 내용도 소개된다. 희귀혈액형 가운데 한국인에게서 출현 빈도가 높은 시스AB형 혈액형, 두 개의 수정란이 하나로 합쳐져 한 사람으로 태어난 키메라의 혈액형 연구 등에 대한 내용이다.
책은 필드 매뉴얼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 편의성과 실용성에도 집중했다. 세부 주제별로 구성된 소챕터를 한 번에 찾아갈 수 있도록 세부 차례를 추가했고, 이를 다시 책 표지 뒤에 정리했다. 또한 실제 수혈과 관계된 일을 하는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와 전공의, 임상병리사와 간호사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궁금증을 직접 듣고, 이를 바탕으로 주제와 내용을 정리했다. 여기에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현장 실무자들의 질문과 의견을 받는 과정이 포함되었다. 마지막으로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복잡한 수혈 사례를 주제별 문제로 만들어, 독자가 직접 풀어보고 답을 확인해볼 수 있는 실습 과제도 수록했다.
다섯 번째 과학자의 글쓰기
생명과학분야 전문매체 바이오스펙테이터는 ‘과학자의 글쓰기’라는 프로젝트로 신약개발을 비롯한 생명과학분야 첨단연구 현장의 한복판에 있는 과학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왔다. 식물에서 항체의약품 만들기에 도전하는 식물학자, 면역항암제의 대한 개념과 최신 연구의 쟁점을 해설해주는 공대 교수, 2019년 한국에서도 발견되어 2021년 현재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을 설명하는 수의학자, 더 일찍 정확하게 그리고 더 싸고 편리하게 암을 찾는 암진단분야의 첨단연구를 조망하는 생명과학 전문기자의 목소리 등이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목소리의 주인공은 의사다.
지은이 조덕은 진단검사의학과 의사다. 진단검사의학은 미디어와 일상생활에서 주로 만날 수 있는 의학 분야가 아니다. 환자를 직접 치료하는 외과나 내과 임상의사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단과 치료후 추적을 위한 검사라는 막중한 임무가 진단검사의학에 주어진다. 더불어 기초과학과 응용과학 사이에서 첨단의 연구를 담당한다. 진단혈액, 임상화학, 임상미생물, 진단면역, 진단유전 등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연구의 융합이 많이 일어나는 분야다. 코로나19 감염 여부를 판단해내는 것도 진단검사의학의 영역이다.
진단검사의학과에서는 의료현장에서 일어나는 수혈도 관리한다. 국제수혈학회가 분류한 사람의 혈액형은 340여 개다. 수혈할 때 340여 개의 혈액형 모두를 맞추는 것은 아니지만, 임상적으로 중요한 20여 개의 혈액형을 정확하게 확인하고 안전한 가이드라인에 맞게 수혈해야 한다. 혈액을 주는 이와 받는 이 사이의 조합에 오류가 생기면, 수혈받는 이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단검사의학과에서는 이처럼 정확한 혈액형 검사와 안전한 수혈의 조합을 관리한다. 또한 한국에서 희귀혈액형인 Rh(D) 음성 수혈 관리는 물론 기타 희귀혈액형에 대한 대비, 응급상황에서 빠르게 쓸 수 있는 유니버설 블러드(universal blood)에 대한 준비와 연구, 조혈모세포 이식이나 장기 이식 과정에서 맞춰야 하는 혈액형 관리 등의 임무도 주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병원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단검사의학의 활약, 이 가운데에서도 ‘수혈’은 야구 경기의 수비수처럼 보인다. 몸을 날려 공을 잡아내는 외야수는 관중에게 짜릿한 즐거움을 주며 주목받는다. 그러나 화려한 플레이를 하다가 놓친 한 번의 공이 팀을 패배로 몰아넣을지 모른다. 반대로 공이 날아올 곳에 먼저 도착해 수비를 펼치는 내야수는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그의 안정감 있고 믿을 수 있는 경기 운영은 팀 승리에 결정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한 번의 치료로 삶과 죽음이 갈릴 수 있는 의료현장이라면, 화려함보다는 안정감이 더욱 간절하다. 그래서 이 책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차분하게 환자의 안전을 지켜내고, 첨단의 연구로 더 안전해지는 방법을 찾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노련미 넘치는 코치가 보내는 수혈의학에 대한 노련한 작전 지시와도 같다.
◆조덕 지음 / 바이오스펙테이터 펴냄 / 140×215mm / 218쪽 / 무선제본 / 2021.08.06. / 값 18,000원 / ISBN 979-11-91768-00-8 93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