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준 다돌책방 편집장
2017년 봄, 바이오스펙테이터와의 첫 작업으로 『바이오사이언스의 이해』 초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아주 우연한 기회로 작업에 합류하게 됐다. 하지만 문과와 이과 사이에 강력한 벽을 세워놓은 교육과정 덕분(?)에, 문과 출신인 나는 항원과 항체도 구분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바이오스펙테이터가 쌓아놓은 컨텐츠를 이해하기에는 벅찼고, 작업을 함께 했던 바이오스펙테이터 기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내야 했다. 대책없는 나의 질문에, 기자들은 비전문가를 대상으로 최대한 쉽게 설명해주려 애를 쓸 수밖에 없었다. 『바이오사이언스의 이해』 초판은 이런 과정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출간이 가까워지고 있던 막바지 편집회의에서 ‘바이오시밀러’에 대한 토론이 시작됐다. 나는 말했다. “바이오시밀러가 많이 어려운가요? 한국이 제일 잘 할 것 같기도 하고, 되기만 하면 약값이 싸져서 환자들에게 너무 좋을 것 같은데요!”
바이오시밀러는 이제 막 시장에 나오며 상업성측면에서의 개념입증을 해나가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러나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보다는, 업계에선 성공을 제한적으로 보는 이유들이 좀 더 많았다. 편집회의는 긴 토론으로 이어졌고, 과학을 모르는 편집자와 매일 첨단 과학을 만나는 기자들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과감하게 상상해야, 간신히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책의 뒷부분에 자리잡고 있었던 바이오시밀러 챕터를 맨 앞부분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로부터 6년의 시간이 흐른 2023년, 『바이오사이언스의 이해』 개정판의 막바지 편집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편집회의가 흘러가는 양상은 6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과학을 잘 모르는 편집자였고, 기자들은 그 사이 엄청나게 앞으로 나아간 과학을 설명했다. 그리고 ‘과감하게 상상해야, 간신히 이룰 수 있다’는 원칙 또한 테이블 위에 그대로 올라앉아 있었다. 덕분에 이번에도 편집 막바지에, 책 뒷부분으로 갈 예정이었던 ‘의료 AI’를 맨 앞으로 옮길 수 있었다. 의료 AI는 이제 막 발걸음을 뗐지만 한국이 제일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판’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의료 AI는 판을 바꿀 것인가
잘 사는 나라들은 인프라가 좋지만 인구가 고령화되면서 보건의료 수요가 늘어간다. 잘 살지 못하는 나라들은 인프라가 나쁜데 인구가 늘어나면서 보건의료 수요가 늘어간다. 그리고 인프라가 좋든 나쁘든, 잘 사는 나라든 그렇지 못한 나라든 ‘의사가 부족하다’는 점에서도 같다. 모두 어떤 식으로든 부족한 의사를 채워야 한다. 이 대목에서 과학이 낼 수 있는 답은 선명하다. 의사의 지능을 탑재한 의료 AI를 만들면 된다.
개정판 편집회의에서 루닛(Lunit)이 유방암, 폐암 환자의 영상 이미지를 학습한 AI로 암을 찾아내는 도전에서 성과를 내고 있으며, 면역항암제를 정확하게 처방할 수 있는 AI로의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순간은, 2017년 『바이오사이언스의 이해』 편집회의에서 바이오시밀러에 대한 질문과 답변, 토론을 이어갈 때와 비슷했다.
루닛은 2020년, 바이오스펙테이터와 함께 『진단이라는 신약-조기진단, 동반진단, 전이암진단, 이미징마커』 작업을 할 때 처음 들었던 바이오텍이었다. 그리고 2023년에 다시 듣게 된 루닛은 계속 답을 찾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매일 새롭게 연구되는 첨단 의학지식을 받아들이며, 오랫동안 수많은 환자와 질병을 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탁월한 치료를 펼치는 의사를 명의(名醫)라고 부른다면, 루닛은 명의의 지능을 닮은 또는 명의의 지능을 넘어서는 의료 AI를 만들고 있었다. 이는 2017년 바이오시밀러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한국에는 바이오시밀러라는 과감한 상상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는 인력과 노하우와 의지가 있었다. 2023년 한국에는 IT를 잘 할 수 있는 인력과 노하우가 있고, AI를 학습시킬 암 환자의 영상 이미지 데이터가 충분하니, 제대로만 하면 의료 AI는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편집회의는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의료 AI를 『바이오사이언스의 이해』 개정판의 맨 뒤에서 맨 앞으로 옮겼다.
개정판 1쇄를 인쇄한 지 딱 7개월 만에 3쇄를 찍으며 루닛이 볼파라(Volpara Health Technology)를 인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분 100% 인수하는 가격으로 1억9000만 달러를 냈다고 하니, 볼파라가 가진 영상 이미지 1억 장을 사들였다고 보면, 영상 1장에 2달러 남짓이다. ‘싸게 잘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0년에 시작한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HGP)에서 유전체 1개의 염기쌍을 푸는 데 1달러가 들어가는 것으로 계산해 30억 달러의 예산을 계획했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묘하게 겹치는 숫자들은 ‘이제 한국도 제대로 과학을 하는구나’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세상 일을 알 수 없기에 ‘제대로’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여전히 위험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제대로’라는 말을 붙여도 될 것 같아 보였다.
과학의 마지막 목표는 일상이 되는 것이다
잠도 안 자면서 쉬지 않고 암을 찾아내고 그러면서 계속 정확해지는 루닛의 의료 AI는, 오늘은 영상의학과 의사를 돕지만 내일은 영상의학과 의사를 대체할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평범하고 당연한 의료 프로세스가 될 것이다. 의료 AI가 암을 정확하게 찾아내고, 환자에게 최적화된 치료법을 설계하는 데 구체적이고 효율적이며 효과적인 이점이 있다면,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암산이 뛰어나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회계사와, 암산 실력은 부족하지만 전자계산기와 엑셀을 쓰는 회계사 가운데 누구에게 회계를 맡기고 싶을까? 심지어 환자의 생명이 달린 일이라면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리게 될까?
신약개발 임상시험은 어떨까? 의료 AI는 후보물질이 효과 있을지 없을지 판단하는 데 사용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임상시험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줄여줄지도 모른다. 미국 FDA는 의료 AI를 바탕으로 신약을 승인하지 않을까? 어느새 당연해진 듯하지만, 바이오마커를 기반으로 한 신약 승인은 최근의 일이다. 과학 앞에 솔직한 FDA는 의료 AI 앞에서 가장 적극적일지 모른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양의 학습을 거쳤을 때 의료 AI는 또 무슨 일을 벌일까? 말 그대로 ‘신약을 툭툭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 찾아지지는 않을까? 이와 같은 상상과 변화는 놀랍거나 새로운 일이 아니다. 당장 10년 전, 그리고 그 10년 전과 오늘을 비교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상상과 변화는 ‘과학이라면 당연한 일’이고,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의료라면 절실한 일’이다.
판을 뒤집는 것만큼 흥분되는 일은 없다
AI는 이미 현실이다. 최고의 바둑기사 이세돌과 구글의 바둑 AI '알파고'의 대결에서 AI가 승리한 것은 2016년이다. AI의 승리를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2024년 현재 인간과 인간 사이의 바둑 경기를 중계할 때, 좋은 수와 나쁜 수에 대한 판단을 AI에게 의존하고 있다. AI는 각각의 수를 둠에 따라 바뀌는 승률까지 계산하는데, 즉 AI가 바둑판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한 정량적인 진단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AI가 바둑에서 활약하자 인간의 바둑 실력이 함께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AI를 활용하다 보니 바둑기사들의 실력이 전반적으로 올라가고 창조적인 수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
좀 더 가까운 사례는 없을까? 길 위에 다니는 모든 자동차에 자율주행 시스템을 탑재하고, 그 모든 자동차의 자율주행 시스템이 연결되고, 여기에 신호등과 같은 교통 통제시스템까지 붙여 AI를 돌린다고 상상해보자. 한 해 20만 건에 이르는 교통사고는 크게 줄어들 것이고, 꼬리물기 때문에 경적 소리와 욕설로 교차로가 시끄러워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물론 목적지까지의 도착 시간은 정확해지고, 덕분에 탄소 배출도 줄어들 것이다. 모두 이미 실현 가능한 일이다. 이미 실제로 자율주행 지하철, 버스가 현실이 되고 있다.
바둑도 자동차의 자율주행도, AI가 높은 정확성과 신뢰성으로 현실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AI는 어디에 먼저 그리고 적극적으로 적용되어야 할까? 인간 바둑기사의 수를 진단하는 것보다 환자의 암을 진단하는 일과, 도로교통에서 안전성과 효율성을 담보하는 것보다 항암제의 처방 안전성과 효율성을 담보하는 일에 서둘러 투입되어야 하지 않을까? 의료 AI의 도움, 의료 AI와의 협력, 의료 AI와 벌이는 경쟁은 더 많은 환자의 목숨을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남은 것은 규제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규제는 안전한 도로교통을 지키는 교통경찰이어야 하지만,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열어가려고 맨 앞에서 달리는 이들에게 과감하게 길을 열어주는 콘보이(convoy)이기도 해야 한다. 의료를 돕는 보조도구의 역할을 넘어, 명의의 지능을 넘어설 수 있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규제가 제 역할을 다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바이오시밀러는, ‘현실적’이라는 강력한 판의 경계에서 상상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경계에서 시작했기에 벽을 허물고 판을 뒤집을 수 있었다. 의료 AI도 경계에서 상상하기 시작했고, 이미 벽을 허물고 있다. 이제 판을 뒤집을 일이 남았다. 그래서 언제가 될지 예단할 수는 없지만, 벌써부터 개정3판을 준비하는 편집회의가 기다려진다. 의료 AI가 판을 뒤집었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판을 뒤집을 새로운 무엇인가를 두고 토론이 벌어질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