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스펙테이터 천승현 기자
국내 바이오·제약 기업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촉망받던 ‘천연물신약’이라는 용어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전망이다. 정부의 허가 규정에서 천연물신약이라는 용어 자체가 자취를 감춘다. 천연물의약품의 특성상 신약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지적에서다. 천연물신약의 허가 심사 지원 정책도 사라지면서 허가 요건이 종전보다 대폭 엄격해졌다. 제약ㆍ바이오기업들은 제품 광고에 천연물신약이라는 용어 사용도 금지된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최근 '의약품의 품목허가·신고·심사 규정' 일부 개정고시를 행정예고했다. 행정예고안에는 천연물신약의 정의를 삭제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천연물신약의 임상시험의 종류 및 시험방법, 천연물신약의 신속심사 근거 조항 등 천연물신약과 관련된 허가 규정이 모두 삭제된다.
식약처는 지난해 한약(생약)제제 등의 품목허가·신고에 관한 규정의 개정을 통해 천연물신약 용어를 삭제한 바 있다. 이번에 행정예고한 고시가 공포되면 국내 의약품 허가 규정에서는 ‘천연물신약’이라는 용어는 모두 사라지는 셈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천연물신약은 ‘천연물신약 연구개발 촉진법’에서 정의하고 있는 용어로, 약사법상 ‘신약’의 정의와 달라 오인될 수지가 있다”라며 천연물신약 용어 삭제 이유를 설명했다.
약사법상 신약은 이미 허가된 의약품과는 화학구조 또는 본질조성이 전혀 다른 새로운 의약품으로 정의되는데 생약이나 한약을 사용해 만든 천연물의약품은 신약이라는 단어 뜻과 거리가 멀다는 판단에 천연물신약이라는 용어를 더 이상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감사원의 천연물신약 특혜 지적에 용어 삭제
천연물신약 용어 삭제 조치는 감사원의 지적에 따라 이뤄졌다.
감사원은 지난 2015년 ‘천연물신약 연구개발사업 추진실태’ 감사를 통해 천연물신약이 허가 심사 과정에서 지나친 특혜를 받고 있다고 문제삼았다.
천연물신약이라는 용어는 보건복지부가 2000년 제정한 ‘천연물신약 연구개발 촉진법’이 기원이다. 당시 천연물 성분을 이용한 신약연구개발과 산업화를 촉진하기 위해 이 법이 신설됐다.
식약처는 2002년 당시 의약품 품목허가 고시인 ‘의약품 등의 안전성· 유효성 심사에 관한 규정’에 천연물신약에 대한 허가 요건 및 심사 기준을 별도로 신설했다. 천연물신약은 ‘천연물 성분을 이용해 연구·개발한 의약품 중 조성성분·효능 등이 새로운 의약품’으로 규정했다.
이후 식약처는 천연물신약의 경우 허가시 제출자료 요건과 심사기준이 신약에 비해 완화하는 내용도 추가됐다. 예를 들어 천연물신약은 독성에 관한 자료 12가지 중 유전독성, 생식독성, 발암성 등 10가지 자료 심사를 면제하고 동물에 대한 약리작용 등 약효시험과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시험도 일부 면제하는 내용을 담았다. 국내 제약업계의 천연물신약을 육성하겠다는 취지에서다.
SK케미칼의 ‘조인스’, 동아에스티의 ‘스티렌’과 ‘모티리톤’, 녹십자의 ‘신바로’, 안국약품의 ‘시네츄라’, 한국피엠지제약의 ‘레일라’, 영진약품의 ‘유토마’ 등이 식약처로부터 천연물신약으로 허가받았다.
그러나 감사원은 천연물신약이라는 이유로 신약에 비해 느슨한 허가 심사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지적했다.
감사원은 “기존의 한약·생약제제 등 전통적 의약품과 차별화된 글로벌 기준을 충족하는 천연물신약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신약개발 과정을 적용해 유효 성분의 연구, 독성 및 약리작용 등에 대한 과학적 검증을 강화하고 천연물신약의 안전성·유효성 심사기준도 합리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며 천연물신약의 허가심사 기준을 신약 수준으로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성분프로파일 제출' 등 천연물의약품 허가 규제 강화
식약처가 의약품 허가 규정에서 천연물신약의 별도 허가 요건을 삭제함에 따라 기존의 천연물신약의 허가 특혜도 사라졌다.
지난해 개정된 한약(생약)제제 등의 품목허가·신고에 관한 규정을 보면 천연물의약품의 품질관리 수준을 제고하고 안전성을 강화하기 위해 종전보다 엄격한 허가 요건을 도입했다.
대표적으로 한약(생약)제제 추출물은 성분프로파일 자료를 제출토록 변경했다. 성분프로파일은 한약(생약)제제에 함유된 다양한 성분의 조성, 비율 및 함량을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분석자료의 패턴을 말한다.
식물, 동물 또는 광물로부터 제조된 한약(생약)제제는 다양한 화합물의 혼합물로 구성돼 함유된 화합물의 구조와 특성을 모두 규명하는 것이 어렵고, 각 성분과 약리활성간의 상관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식약처는 한약(생약)제제의 품질관리는 주성분을 구성하는 특정한 지표성분의 함량 뿐만 아니라 다양한 화합물의 조성, 비율 및 함량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성분프로파일 자료를 제출도록 했다. 미국, EU에서도 성분프로파일 자료를 제출받고 있어 국제조화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게 식약처 설명이다.
한약(생약)제제의 허가를 신청할 때 잔류·오염물질에 대한 안전성 자료를 제출하는 내용도 신설됐다. 한약(생약)제제는 기본적으로 자연에 존재하는 천연물을 원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재배과정 등에서 유해한 잔류·오염물질의 혼입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유해물질 안전관리를 강화했다.
실제로 식약처는 기허가된 천연물의약품을 대상으로 ‘벤조피렌’ 관리 기준을 강화했다. 식약처는 지난해 위염치료제 ‘스티렌’과 스티렌 제네릭 90여개 품목을 대상으로 벤조피렌 검출량을 일정 수준으로 줄인 제품만 출하를 허용할 것을 통보했다. 스티렌은 동아에스티가 쑥을 원료로 만든 위염치료제로 국산 천연물신약 중 가장 많이 팔린 제품이다.
당초 식약처는 벤조피렌과 같이 제조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넣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물질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러나 감사원이 "국민 건강에 위해가 없도록 조속히 벤조피렌 저감화 등 적정한 조치를 하고 벤조피렌의 잔류허용기준 설정을 검토하는 등 관리방안을 마련하라”고 촉구하자 식약처는 관련 규제를 강화했다.
식약처는 지난해 10월 한국유나이티드제약의 ‘스타렉신’이 벤조피렌 기준치를 초과했다며 강제회수와 제조업무정지 3개월 처분을 내렸다.
식약처는 △아이비엽에탄올엑스 △달맞이꽃종자유 △포도씨엑스 △위령선ㆍ괄루근ㆍ하고초에탄올엑스 등 15개 성분으로 구성된 700여개 의약품에 대해 올해 12월말까지 벤조피렌 검출량을 일정 수준으로 낮춘 원료의약품을 등록하라고 지시한 상태다.
◇천연물의약품 약가인하에 광고 금지까지..천연물신약 입지 위축
2015년 감사원의 천연물신약 연구개발사업 추진실태 감사는 천연물신약의 약가인하도 유도했다.
복지부는 지난해 10월국내제약사가 개발한 천연물신약 4종의 보험상한가를 9.9% 인하했다.녹십자의 ‘신바로캡슐’(232원→209원)과 ‘신바로정’(233원→221원)이 각각 9.9%, 5.2% 내려갔다. 동아에스티의 ‘모티리톤정’(154원→152원)과 한국피엠지제약의 레일라정(433원→411원)은 각각 1.3%, 5.1%의 약가인하율이 적용됐다.
감사원이 천연물신약 요양급여 적정성 평가가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데 따른 후속조치다. 감사원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국산 천연물신약을 우대한다는 등의 이유로 일반적인 신약 제품과 다른 기준을 적용해 높은 약가를 부여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신바로의 경우 화이자의 소염진통제 ‘쎄레브렉스’와 비교해 유효성이 비열등함을 입증하는 임상시험 자료를 제출했는데도 쎄레브렉스보다 높은 약가를 받은 것은 부적정하다고 꼬집었다.
제약·바이오기업의 천연물신약이라는 용어를 활용한 광고도 엄격하게 금지된다. 식약처는 최근 한국제약바이오협회에 협조 공문을 보내 한약(생약)제제의 경우 올해 7월부터 천연물신약을 사용한 새로운 표시ㆍ광고 행위를 중지하도록 요청했다.
식약처는 "더 이상 기허가 한약(생약)제제 중 '천연물신약' 해당 여부를 판단,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없으며, 천연물신약을 사용한 표시ㆍ광고 행위 는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될 우려가 있다"라고 광고 금지 이유를 설명했다.
식약처 관계자는 "감사원의 지적 등에 따라 천연물신약의 용어를 삭제하고 천연물의약품의 허가 요건을 국제 규격 수준에 맞춰 제출 자료를 다소 추가했다. 일부 자료제출 요건을 제외하면 제약업체 입장에서는 부담이 많이 커진 것은 아니다"라며 "천연물의약품을 개발 중인 제약기업들도 천연물신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