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석 충북대 교수
지난번의 연재를 통하여 항체의 개념과 항체의 다양성이 어떻게 기인하는지, 그리고 단일 항원 항체(Monoclonal antibody)가 이를 규명하기 위한 과정 중에서 어떻게 개발되었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단일 항원 항체가 의약품의 형태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단일 항원 항체가 개발되는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70년대에 탄생한 또 하나의 중요한 생명공학 기술이 필요했다. 바로 재조합 DNA 기술(Recombinant DNA technology)이다.
재조합 DNA 기술이 등장한지 약 40여년이 지난 지금, 재조합 DNA 기술은 생명과학의 기본 연구도구일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바이오테크놀로지의 근간이 된 중요한 핵심 기술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재조합 DNA 기술이 어떤 맥락에서 출현하였으며, 이를 이용한 산업화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본격적으로 항체의약품의 개발에 대해서 알아보기 이전에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재조합 DNA 기술의 태동 – 전환점에 선 분자생물학자들과 폴 버그(Paul Berg)
이제 재조합 DNA 기술이 탄생한 1970년대 초에 재조합 DNA 기술이 출현한 배경을 살펴보자. 바이오텍 산업계의 기반 기술이 된 재조합 DNA 기술이 사실은 1960년대의 일부 분자생물학자의 연구 과정에서 발견된 우연의 산물이고, 처음 등장시에는 지금과 같은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지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1960년대 말의 분자생물학자들은 일종의 기로에 서 있었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 구조의 규명으로 시작된 ‘분자생물학 혁명’은 1960년대 중후반, 유전암호의 규명으로 DNA로부터 RNA를 거쳐 단백질로 유전정보가 전달된다는 기본적인 패러다임이 정립되게 되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큰 그림’이 그려진 이후 분자생물학자들은 다음에는 어떤 연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갈등에 빠지기 시작했다. 일부 분자생물학자는 그 당시에 유전정보와 함께 여태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생명의 신비라고 여겨졌던 뇌와 정신의 비밀을 풀기 위하여 뉴로사이언스로 전환했다. 반면, 일부는 그동안 규명되었던 분자생물학의 원리가 주로 세균에 기생하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를 모델로 하여 규명되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사실 박테리오파지를 모델 시스템으로 이용하여 분자생물학의 기본 원리, 즉 DNA의 복제, DNA로부터 RNA가 만들어지는 전사, 그리고 RNA로부터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번역 과정이 연구된 이유는 다름아닌 박테리오파아지가 세균에 비해서 훨씬 더 간단한 연구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과연 세균에 비해서도 훨씬 복잡한 생명체인 사람과 같은 고등생물에도 기본적인 분자생물학적인 원리가 적용될까? 그러나 문제는 100kb(killobase, killobase는 1,000 염기쌍을 의미한다) 이하의 작은 지놈을 가지고 있고, 기껏해야 수십개의 단백질로 구성된 박테리오파지에 비해서, 수만 배 이상 큰 지놈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같은 진핵생물은 분자생물학적으로 쉽게 접근하기 힘든 대상이었다. 그러나 대개의 분자생물학 연구자 역시 사람인 관계로 자연스럽게 질병과 연관되어 있을 것 같은 사람과 같은 고등생물의 분자생물학 연구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겨우 박테리오파지를 연구하던 당시의 도구로 어떻게 고등생물의 분자생물학을 연구할까?
이러한 고민 속에서 동물 바이러스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분자생물학자가 있었다. 이 중의 한 명은 스탠포드 대학의 폴 버그(Paul Berg) 였다. 폴 버그는 생화학자로서 1960년대에는 단백질 생합성 기전에 대한 연구를 수행중이었다. 그러나 유전암호의 규명이 거의 끝난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이들은 새로운 연구방향을 모색했다. 그가 모델로 선택한 바이러스는 SV40(Simian Virus 40)이라는 이름의 유인원 세포에 감염되어 암을 유도하는 성질을 가지는 바이러스였다. 동물세포에 침투하여 암을 유도할 수 있다는 이 바이러스의 성질은 분자생물학자들이 유전정보의 전달과정과 같은 생명현상의 근본적인 원리 뿐만 아니라 암의 발생원인과 같은 ‘실용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주어야 한다는 당시의 압박에도 잘 부응하는 연구재료였다[1,2].
폴 버그는 그가 이전에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하여 단백질 생합성 기전을 연구한 것과 유사한 생화학적인 방법론을 응용하여 SV40이 어떻게 암을 유발하는지를 연구하려고 했다. 즉 세균에 박테리오파지를 감염시켜, 박테리오파지의 단백질을 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세포에 SV40을 감염시켜 관련된 단백질을 확인하고 정제하는 식의 연구를 계획했다. 그러나 세균과는 달리 동물세포는 훨씬 더 많은 종류의 단백질을 가지고 있는 복잡한 시스템이었으므로, 이러한 생화학적인 접근방식은 잘 작동하지 않았다.
그는 그 대안으로 일종의 분자유전학적인 방법론을 이용하여 동물바이러스를 연구하기로 하였다. 박테리오파지 시절의 주된 연구방법은 다양한 박테리오파지의 돌연변이주(Mutant)를 얻어 이 돌연변이를 분석하고, 돌연변이에 따른 표현형을 분석하여 박테리오파지의 유전자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방법론을 동물바이러스 연구에 사용할 수는 없을까? 그러나 박테리오파지에 연구가 시작되던 즈음이었던 동물바이러스에서는 유전자의 위치를 매핑할 수 있는 유전학 연구도구가 잘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는 동물바이러스를 대상으로 유전학적 연구를 하는 방법을 세균에서 증식하는 박테리오파지를 ‘운반체’로 사용하여 세균에서 동물바이러스를 복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즉 그의 연구실에서는 대장균 안에서 독립적으로 복제되는 DNA 조각(플라스미드 Plasmid) 형태로 증식할 수 있는 박테리오파지의 변종인 λdv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동물바이러스인 SV40의 DNA와 박테리오파지의 DNA인 λdv를 결합시켜 박테리아에 도입한다면, 동물바이러스 SV40 DNA를 세균인 대장균 내에 증식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SV40의 DNA와 박테리오파지의 DNA를 결합시킬 수 있을까? 폴 버그가 재직하고 있었던 스탠포드 대학의 생화학과는 DNA 복제의 기전을 발견한 아서 콘버그(Arthur Konberg)를 비롯한 DNA의 복제, 전사, 번역에 관련된 전문가들이 모여있는 1960년대 DNA 연구의 메카였다. 특히 이들은 아서 콘버그의 주도하에 학교의 교수들이 연구비와 시료 등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일종의 공동체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었다[3]. 즉 스탠포드 대학의 생화학과에는 당시 DNA와 관련된 여러가지 효소들이 발견되어 있었으며, 이중에는 DNA 중합효소(DNA Polymerase), DNA를 결합시키는 DNA 라이게이즈(DNA Ligase) 등이 학과의 냉장고에 비치되어 있었으며, 학과의 구성원들이라면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일단 시험관 내에서 SV40의 DNA와 박테리오파이 람다를 결합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그 다음의 실험 계획은 세균에서 SV40 의 DNA 단편을 증식시키는 것과 반대로 동물세포에서 박테리오파지의 DNA가 포함된 바이러스를 증식시키는 두 가지 실험이 계획되었다. 인류 최초로 인간이 인위적으로 동물계와 미생물계의 유전정보를 인위적으로 융합시키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러나 폴 버그와 실제로 실험을 계획한 대학원생인 자넷 메르츠(Janet Mertz) 는 예상치 않은 주변의 반응에 직면하게 되었다.
‘재조합 DNA 실험 계획’ 이 몰고온 파문'
자넷 메르츠는 1971년 6월 콜드 스프링스 하버(Cold Springs Harbor)에서 열린 동물세포와 바이러스 관련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여기서 그는 그가 하려는 연구계획, 즉 SV40의 DNA와 박테리오파지의 DNA를 결합시킨 후, SV40의 DNA 조각을 대장균 내에서 증식시킬 예정임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실험계획을 들은 코스의 주최자인 로버트 폴락(Robert Pollack)은 이러한 실험계획의 잠재적인 위험성을 지적했다. SV40 자체는 큰 위험이 없는 원숭이 유래 바이러스지만, 가끔 인간이나 쥐에 종양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만약 SV40의 DNA가 들어있는 박테리아가 실험실 밖으로 빠져나가서 환경에 노출되어 사람이나 동물에 암을 유발한다면 어떻게? 물론 이러한 가능성은 높지 않았으나 아무도 해보지 않은 실험의 잠재적인 위험성은 예측하기 힘들었다. 폴락은 메르츠의 지도교수인 폴 버그를 설득하였고 설득하였고, 폴 버그는 결국 메르츠의 실험을 포함한 재조합 DNA 실험의 자발적 일시중지(모라토리엄 moratorium)을 선언하였다. 이후의 코헨과 보이어의 연구 등과 맞물려, 재조합 DNA의 잠재적인 위험성에 대해서 학계가 1975년 캘리포니아의 아실로마에서 논이되기 전까지 많은 재조합 DNA 실험은 자체적으로 중지되었다.
이렇게 폴 버그의 재조합 DNA 실험이 시험관 내에서 서로 다른 종 유래의 DNA를 결합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였지만, 이것을 실제로 살아있는 생물에 넣는 것은 주위의 반발에 직면하여 실제로 진행되지 않았지만, 이 와중에 실제로 재조합 DNA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은 폴 버그의 연구실이 아닌 다른 곳의 연구자들이었다.
최초의 재조합 DNA 실험 – 코헨과 보이어
이렇게 코헨의 동물바이러스와 박테리오파지의 DNA 조각을 결합시켜 이를 박테리아와 동물세포에 넣겠다는 연구 계획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잠재적인 위험성을 제기하는 연구자들 때문에 진행되지 않았지만, 실제로 재조합 DNA 실험을 수행하여 생물 내에서 인위적인 ‘혼종’ DNA를 만든 사람들은 다른 연구자들이었다.
이들은 스탠포드 대학의 유전학과에 근무하던 스탠리 코헨(Stanley N Cohen)과 UCSF의 허버트 보이어(Herbert Boyer)였다. 코헨은 대장균 안에 존재하는 플라스미드(Plasmid)라는 작은 DNA 조각을 연구하는 학자였다. 그는 플라스미드에 종종 항생제 저항성을 가지는 유전자가 존재하며, 이렇게 분리한 플라스미드를 대장균에 넣으면, 이전에 항생제 저항성을 보이지 않던 세균이 항생제 저항성을 보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편 보이어는 대장균에서 EcoRI 이라는 제한효소를 최초로 발견하였다. 이들은 1972년 하와이에서 열린 학회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의 연구결과를 논의했다. 그러던 중, 이들은 역사를 바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코헨이 가지고 있는 플라스미드는 항생제 저항성을 부여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한편 보이어가 가지고 있는 효소는 플라스미드의 한 위치를 정확히 자를 수 있다. 만약 이렇게 자른 두 개의 플라스미드를 붙이고, 대장균에 넣고 항생제가 존재하는 배지 위에서 키워서 두 개의 플라스미드가 결합된 것만 선별해 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이들이 생각한 아이디어는 폴 버그가 시도하려고 했던 SV40과 박테리오파지의 DNA를 결합하려는 연구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폴 버그의 연구의 경우 인간에게 암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를 박테리아에서 증식시키려는 시도였던 관계로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불러일으킨 반면 이들의 연구는 박테리아 내에서 분리된 DNA끼리의 융합이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이러한 반발에서 자유로웠다.
인류 최초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재조합 DN를 살아있는 대장균 세포에 넣어 이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결과는 1973년 코헨과 보이어의 공동 명의로 발표되었다. 이 결과의 의미는 처음에는 그다지 크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자생물학자들은 이 ‘재조합 DNA 기술’이라는 신기술이 그들의 분자생물학 연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너무나도 큰 지놈 사이즈 때문에 연구하기 힘들던 진핵생물의 유전자 구조였지만, 이제 박테리아에서 다룰 수 있는 수 kb 정도의 작은 크기로 자른 다음, 이것을 박테리아에서 증폭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이전에는 박테리오파지나 세균 정도에서만 수행되던 분자생물학 연구가 본격적으로 동물, 식물 등을 포함하는 진핵생물로 이전되게 된 계기가 바로 재조합 DNA 기술의 도입인 것이다.
이렇게 연구용으로 혁명적인 결과를 가져온 재조합 DNA 기술이지만, 처음에는 이를 이용하여 유용한 산물을 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곧 진핵생물의 DNA를 세균에서 복제하는 것 이외에 DNA가 코딩하고 있는 산물인 단백질을 세균에서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학계에서도 어렴풋이 이런 가능성을 생각한 사람들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실제로 실천에 나선 주역은 학계 밖에 있던 사람이었다.
밥 스완슨과 제넨테크
로버트 “밥” 스완슨(Robert “Bob” A Swanson)은 MIT에서 화학 학사와 경영학 석사를 동시에 전공한 젊은이었다. 그는 원래 과학에 흥미를 느껴서 MIT 에 입학하였으나, 곧 과학 연구 자체보다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좀 더 적성에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학교 졸업후 시티뱅크와 벤처캐피탈 클라이너&퍼킨스에서 일했다. 그는 폴 버그의 재조합 DNA 연구로부터 촉발된 ‘재조합 DNA’에 관련된 소식을 들었고, 이의 상업적인 응용을 꿈꿨다. 그는 당시 클라이너&퍼킨스의 고객사인 생명공학 회사 시터스(Cetus, 이 회사는 1980년대에 PCR의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에 재조합 DNA 기술 연구를 권하였으나, 그 노력은 실패하고, 스완슨이 일하던 회사는 시터스와 결별을 하게 된다. 결국 스완슨은 이 계기로 클라이너&퍼킨스로부터 퇴사하여 자신이 독자적으로 재조합 DNA 기술의 상용화를 꿈꾸게 된다.
회사를 나와 백수(?)가 된 스완슨이 벌인 일은 재조합 DNA 연구에 관련된 학계의 학자들과 직접 연락하여 재조합 기술의 상용화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실로마 컨퍼런스에 참석한 재조합 DNA 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명단을 입수하여 알파벳 순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하였다. 폴 버그(Paul Berg)에게 연락을 하였으나 그는 무명의 벤처캐피탈리스트(라기보다는 실제로는 무직의)인 스완슨의 연락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무시했다. 알파벳 순으로 나열된 목록에서 Berg의 다음은 UCSF의 보이어(Boyer)이다. 만약 보이어의 공동 연구자인 코헨(Cohen)이 보이어보다 이니셜이 빠른 순서였다면, 우리가 아는 바이오텍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보이어는 스완슨의 전화를 받고, 그에게 잠깐의 시간을 내주기로 했다. 그 둘은 맥주집에서 만나 이야기하였으며, 이는 곧 구체적인 사업 계획으로 발전했다. 두명의 사람은 일단 DNA 조작 기술을 이용하여 새로운 의약품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회사를 설립하기로 하였으며, 둘이서 각각 500달러씩 출자하여 회사 설립에 드는 법적 비용을 내기로 했다. 보이어는 과학기술적인 분야에 대한 책임을, 스완슨은 회사의 대표로써 회사의 운영을 맡기로 역할분담을 하였으며, 스완슨은 자신이 원래 일하던 벤처캐피탈 회사인 클라이너&퍼킨스에 사업계획을 제출하고 약 50만 달러의 초기 시드머니를 요청하였고, 이 회사에서는 스완슨이 요청한 것의 1/5 인 10만 달러의 초기 시드머니를 제공하였다. 남은 것은 회사의 이름이었는데 스완슨은 보이어와 자신의 이름을 딴 ‘HerBob’이라는 회사 이름을 제안하였으나, 보이어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 회사 이름을 ‘Genetic Technology’를 상징하는 ‘Genentech’, 즉 ‘제넨테크’ 라고 붙이기로 했다. 이것이 바이오텍이라는 새로운 산업계를 연 제넨테크의 시작인 셈이다.
최초의 ‘바이올로직’
그렇다면 신생 바이오텍 회사인 제넨테크의 첫 제품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이들은 인슐린에 주목했다. 기존의 인슐린은 소나 돼지의 췌장에서 채취되었으므로, 동물 유래 조직으로부터의 추출은 매우 비용이 많이 들었으며, 또한 동물성 인슐린에 함유된 미세한 불순물이 알러지 반응등의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보고가 있었다. 또한 인슐린은 두 개의 아미노산 사슬로 결합된 약 50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단백질인데, 인슐린은 1958년 프레데릭 생거(Frederic Sanger)에 의해서 최초로 그 아미노산 서열이 규명된 단백질이자, 1969년 도로시 호지킨(Dorothy Hodkin) 에 의해서 단백질 입체구조까지 알려진 단백질로써 1970년대 중반 당시 단백질의 서열이 알려진 몇개 안되는 유용 단백질이었다. (다른 수 많은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이 알려진 것은 DNA 조작 기술에 의해서 해당 유전자가 클로닝되고, 그 염기서열이 결정될 수 있었던 1970년대 말 이후에서였다) 따라서 인슐린을 재조합 DNA 기술을 이용하여 동물 췌장 대신 세균에서 생산하는 것은 그 생산효율을 높일 수 있을 뿐더러 동물 유래의 불순물의 우려를 줄일 수 있는 좋은 방안으로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인간 인슐린을 세균에서 생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인슐린 유전자가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놈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생물의 어떤 유전자든 PCR로 증폭해낼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의 유전자에 대한 정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의 서열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30억 염기서열로 구성된 지놈 서열 중에서 특정한 유전자가 포함된 영역만을 재조합 DNA 기술을 이용해서 분리해 내는 클로닝(Cloning) 이라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 당시에는 유전자를 분리하는 것 자체가 매우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다른 방법이라면 인슐린의 아미노산 서열은 이미 밝혀져 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완전한 합성유전자를 만들어서 이를 이용하여 단백질을 발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슐린은 두 개의 아미노산 사슬로 구성되어 있는 단백질로 당시의 기술로는 매우 긴 약 150 염기서열 이상의 인공 유전자의 합성이 필요했다. 과연 당시의 기술로 이것이 가능할까?
신생 제넨테크가 먼저 시도한 것은 인슐린이 아닌 소마토스태틴(Somatostatin) 이라는 아미노산 14개 짜리의 단백질이었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박테리아에서 외래 동물의 단백질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인슐린과 같이 ‘거대한’ 단백질을 처음부터 시도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부담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개념 확인 (Proof of Concept)의 측면에서 소마토스태틴을 먼저 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스완슨은 상업적으로 이용가치가 없는 소마토스태틴의 합성을 시도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보이어와 스완슨은 서로 강한 의견충돌이 있었으나, 결국 이러한 단계적인 어프로치가 위험성을 줄이고, 소마토스타틴이 성공하면 좀 더 많은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는 설득에 스완슨은 동의하였다.
그들은 LA의 City of Hope Hospital 의 두 명의 과학자(케이치 이타쿠라와 아트 리그)에게 소마토스태틴 유전자를 합성하는 것을 아웃소싱하고, 이 유전자를 세균에서 발현시킬 재조합 플라스미드를 준비했다. 그러나 매우 실망스럽게도 첫번째 시도에서는 전혀 소마토스태틴이 검출되지 않았다. 이 결과에 너무 실망한 스완슨은 복통을 일으켜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다.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아마도 만들어진 소마토스태틴이 너무 작은 단백질이라 대장균 내에서 단백질 분해효소에 의해서 분해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이를 막기 위해 이번에는 대장균의 단백질인 베타-갈락토스 분해효소의 끝에 소마토스태틴을 연결하여 단백질을 만들어보기로 하였다. 약 3개월 후 시도한 두번쩨 실험에서는 소마토스태틴이 정상적으로 융합 단백질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이 확인되었다[5]. 소마토스태틴 자체는 실용적인 가치가 있는 단백질은 아니었지만, 제넨테크는 성공적으로 재조합 DNA 기술을 이용하여 세균에서 동물 유래의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다는 실증을 하였으며, 이는 회사와 그의 투자자들에게 이들이 제대로 된 길로 가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제넨테크의 성공의 길과 한계
소마토스태틴의 성공 이후 이들은 최초의 계획대로 합성 유전자를 이용한 인슐린의 합성에 성공하였으며, 재조합 인슐린의 판매는 1982년 FDA 로부터 승인되었다. 그 이후로 제넨테크는 점점 복잡한 재조합 단백질의 생산에 성공한다.
1979년 제넨테크는 191 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진 인간 성장호르몬(human Growth Hormone) 을 대장균에서 생산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이는 1985년 성장 저해를 겪고 있는 어린이의 치료용으로 FDA의 승인을 받는다. 특기할 점이라면 제넨테크의 공동창업자 중의 한 명인 허버트 보이어가 처음 창업을 생각하게 된 동기와 인간 성장호르몬은 관계가 있었다. 허버트 보이어의 자녀 중 한 명이 성장이 좋지 않아 의사와 상의하던 중 성장호르몬 수준을 조사해 보라는 조언이 나왔으며, 이를 통해 성장호르몬 투여를 통하여 성장 저해를 겪는 어린이의 성장 촉진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가 나왔으며, 이것이 제넨테크의 직접적인 창립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술회이다[6]. 1980년 제넨테크는 ‘GENE’ 이라는 기호로 기업공개(IPO) 되었으며, 35달러인 공모주가는 당일 71.25달러로 치솟았다. 스완슨과 보이어를 포함한 창업자들은 억만장자가 되었다. 1984년에는 혈액응고 단백질인 팩터 VIII(Factor VIII) 의 재조합 단백질로의 생산에 성공하였다. 이전에는 혈액에서 추출되었던 팩터 VIII 는 1980년 AIDS의 범람에 의하여 혈액에서 추출된 팩터 VIII 에 HIV가 오염되어 감염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로 큰 충격이 있었고, 이러한 우려가 없는 재조합 단백질로의 생산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팩터 VIII는 기존에 재조합 단백질로 생산된 단백질에 비해서 현저하게 큰 단백질로써 2322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진 단백질이었으며, 대장균에서의 생산도 불가능했다. 동물세포인 CHO 세포(Chinese hamster ovary) 를 이용하여 재조합 단백질을 생산하고, 정제하여 혈우병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최초 보고가 1989년 등장하였다[7]. 1990년까지 제넨테크는 재조합 인슐린, 인간성장호르몬, 인터페론 알파-2A, 조직형 플라스미노겐 활성인자 (tPA, tissue Plasminogen Activator) 등의 재조합 단백질 의약품의 생산허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제넨테크가 1980년대 중반까지 개척한 ‘1세대 바이올로직’의 시장은 즉 재조합 단백질 의약품은 엄밀하게 말하면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단백질 의약품은 아니었다. 즉 인슐린이나 인간성장호르몬, 팩터VIII 등은 결국 동물 유래의 단백질로써 이들의 생물학적 효용이 이전에 알려진 것들이며, 제넨테크는 단지 재조합 DNA 기술을 이용하여 이들을 좀 더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든 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넨테크의 성공은 곧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즉, 재조합 DNA 기술을 이용하여 기존에 존재하던 단백질 의약품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을 넘어서, 기존에 존재한 적이 없는, 현재까지 약이 없는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새로운 치료제가 회사의 지속적인 성장에 필요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재조합 DNA 기술과 이를 이용한 재조합 단백질 생산 기술을 이용하여 어떻게 전혀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질병의 기전에 대한 보다 정확한 분자수준의 이해가 필요했다.
다음 연재에서는 어떻게 ‘새로운 약의 타겟’ 을 이들이 발견하고,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신약의 개발로 이어지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참고문헌
1. Yi, D. (2015). The Recombinant University: Genetic Engineering and the Emergence of Stanford Biotechnolog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 Mukherjee, S. (2015). The Gene : An intimate history Simon and Schuster.p189
3. 이두갑 (2013), "아서 콘버그의 DNA 연구와 공동체적 구조의 건설",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p131-149
4. Cohen, S. N., Chang, A. C., Boyer, H. W., & Helling, R. B. (1973). Construction of biologically functional bacterial plasmids in vitro.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70(11), 3240-3244.
5. Itakura, K., Hirose, T., Crea, R., Riggs, A. D., Heyneker, H. L., Bolivar, F., & Boyer, H. W. (1977). Expression in Escherichia coli of a chemically synthesized gene for the hormone somatostatin. Science, 198(4321), 1056-1063.
6. https://www.gene.com/media/news-features/25th-anniversary-of-first-product-approval
7. White, G. C., McMillan, C. W., Kingdon, H. S., & Shoemaker, C. B. (1989). Use of recombinant antihemophilic factor in the treatment of two patients with classic hemophilia.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320(3), 166-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