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스펙테이터 천승현 기자
국내 제약업계 맏형격인 한국제약협회가 5년 전 완화된 임상시험 규제를 다시 강화해달라고 정부에 건의했다. 업체별 이해관계에 따라 첨예한 갈등이 예상되는 사안을 사전 의견 수렴 절차 없이 전달해 제약사들의 불만이 확산되고 있다. 보건당국은 제약업계 전체 의견을 들어보고 검토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제약협회 “공동생동 허용 품목 수 4개로 제한” 식약처에 건의
22일 업계에 따르면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제약사들에 의약품 위수탁 및 공동생동 허용 품목 수를 4개로 제한하는 규제를 다시 신설하는 것에 대한 입장(견해)을 오는 29일까지 회신해달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제약협회가 건의한 규제 강화에 대해 전체 제약사들의 의견을 직접 들어보겠다는 취지다. 이 공문은 중견기업 상생협의회, 한국제약협동조합, 글로팜엑스 등 또 다른 제약산업 관련 기관에 발송됐다.
식약처는 공문을 통해 “최근 한국제약협회는 생동성시험을 직접 실시하는 회사 수의 감소는 제약산업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과잉 공급된 동일성분 품목은 불공정 거래 등의 단초가 될 수 있어 위수탁 및 공동생동 허용 품목 수를 4개로 제한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제출했다”고 설명했다.
식약처가 의견 수렴에 착수한 ‘공동 생동(위탁) 제한’은 제약사가 제네릭 허가 필수 절차인 생물학적동등성시험(생동성시험)을 진행할 때 참여 업체 수를 제한하는 일종의 임상 규제다. 지난 2007년부터 5월 2011년 11월까지 공동 생동·위탁 업체 수를 2개 업체까지 제한했다.
예를 들어 같은 공장에서 똑같은 공정을 통해 같은 성분의 6개 제네릭을 생산하더라도 생동성시험은 2개씩 3그룹으로 나눠서 진행해야 한다는 의미다. A제약사가 B사가 생산중인 제품을 제품명만 다르게 위탁받아 생산하고 허가를 받으려면 같은 제품이더라도 A사가 별도로 생동시험을 진행해야만 허가를 내주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식약청은 지난 2006년 생동조작 파문 이후 제네릭 제품의 무차별적인 시장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 이 규제를 한시적으로 운영하다 2011년 폐지했다. ‘같은 공장에서 생산하는 똑같은 의약품인데도 임상시험을 따로 진행하토록 하는 것은 불합리한 규제’라는 제약업계의 지적이 수용됐다.
이 규제가 폐지된지 5년 만에 제약협회는 공동생동 제한 규제를 부활해달라고 식약처에 건의한 것이다. 다만 공동 생동 제한 업체 수는 4개로 종전 2개에서 다소 완화해달라고 요구했다.
제약협회가 공동 생동 제한 규제의 부활을 요구한 배경은 제네릭의 난립 때문이다. 공동생동 제한이 풀리면서 제네릭 시장 진입 장벽이 낮아지자 제약사들이 위수탁을 통해 무분별하게 제네릭을 발매, 과당경쟁에 따른 불법 리베이트 영업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게 제약협회 시각이다.
실제로 공동생동 규제가 폐지되기 전인 지난 2011년 10월 ‘리피토10mg’의 제네릭 수는 29개에 불과했지만 현재 104개로 늘었다.
지난 17일 국회에서 열린 '제약산업 발전 방안 모색을 위한 공청회'에서 갈원일 제약협회 부회장은 “과당경쟁은 불공정 거래 발생원인이다. 적절한 제네릭 품목수가 허가 될 수 있도록 허가규정 개선 방안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식약처·제약업계, 제약協 건의에 ‘화들짝’.."누구 의도?" 의혹 증폭
제약협회의 ‘공동생동 제한 부활’ 건의에 식약처와 제약업계 모두 깜짝 놀라는 눈치다. 공동생동 제한은 제약사의 이해관계에 따라 찬반이 확연이 엇갈리는 사안인데 제약협회가 모든 제약업계의 의견인 것처럼 건의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공동생동 규제가 부활되면 기존 제네릭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는 상위제약사들은 찬성할 가능성이 높다. 무분별한 후발주자의 등장으로 인한 과당경쟁을 피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수탁 사업을 활발히 진행 중이거나 제네릭 후발주자 입장에서는 공동생동 규제는 시장 진입 장벽을 높이는 것이어서 반가울리 없다.
식약처는 제약협회의 건의 내용이 제약업계 전체 의견인지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5년 전에 제약업계의 요구로 규제를 완화했는데 갑작스럽게 규제 부활을 요구해 업계 전체 의견을 들어볼 계획이다”고 말했다. 식약처가 이번에 공동생동 규제 부활 관련 의견 제출 요구를 제약협회를 제외한 중소·중견 제약사들이 참여하는 협회에 보낸 배경이다.
중견기업 상생협의회는 중견제약사가 참여하고, 한국제약협동조합은 중소제약사들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글로팜엑스는 의약품 수출 해외 규제이슈 관리 협의체로 의약품수출입협회와 제약사 20여곳이 주축으로 운영된다.
제약협회 소속 제약사들도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이번 제약협회의 건의가 회원사들의 의견을 거치지 않고 식약처에 전달돼 건의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업체가 대다수다. 제약협회에는 총 199개 업체가 가입돼 있다.
제약협회의 한 회원사 관계자는 “공동생동 제한은 회사 영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라 업체마다 찬반이 엇갈리는 민감한 사안이다”면서 “회사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안이 전체 의견인 것처럼 정부에 건의돼 당황스럽다. 과연 공동생동 제한 부활로 수혜를 입는 업체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고 토로했다.
결과적으로 제약업계 맏형 역할을 자처하는 제약협회가 회원사들의 의견도 수렴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부의 건의한 셈이다. 식약처 입장에서도 제약협회의 의견이 제약업계 전체 의견일 수 없다고 판단, 또 다른 협회에 의견을 문의한 셈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제약협회의 공식 건의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제약협회 회원사들이 모두 규제 부활에 찬성하는 의견을 낸 것으로 이해됐다”면서 “모든 제약사들이 만장일치로 규제 부활을 요구하면 검토해볼 수 있다”고 전했다.
제약협회 관계자는 “이번 건의서는 이사장단의 의결 등 관련 절차를 거쳐 발송했다”면서 “공동생동 제한은 합의된 의견이 나올 수 없는 사안이다. 논란이 있더라도 논의를 해보자는 취지로 건의했다”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