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스펙테이터 천승현 기자
지난해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igence) 알파고의 등장 이후 전 세계적으로 AI에 대한 관심이 치솟았다. 의약품 산업에서도 ‘AI를 활용한 신약개발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호기심이 쏟아졌고 글로벌 기업들도 점차적으로 신약 개발에 AI를 접목하는 시도가 늘고 있다.
국내에서도 바이오기업 크리스탈지노믹스가 AI 기술을 보유한 스탠다임과 신약개발에 착수하며 업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크리스탈지노믹스는 지난달 스탠다임과 AI 딥러닝((Deep Learning) 학습 기반 예측 모델을 통해 암, 류머티스, 간 질환 등의 분야에서 신약 후보 발굴 및 개발에 공동으로 협력키로 했다.
과연 AI를 활용한 신약개발이 현실성이 있을까. 스탠다임의 김진한 대표(CEO)와 송상옥 이사(COO)는 최근 서울 강남구 스탠다임 본사에서 만난 자리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라고 자신했다. 김 대표와 송 이사는 윤소정 이사와 함께 2015년 스탠다임을 설립한 공동 창업자다. 이날 인터뷰에는 크리스탈지노믹스의 정인철 부사장(CFO)과 스티브김 사업개발 이사도 동석했다.
스탠다임이 시도하는 신약 개발 원리는 간단하면서도 복잡하다. 기존에 개발된 의약품의 화학적 특성을 활용해 새로운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는 신약재창출(Drug Repositioning)이다. 스탠다임의 딥러닝(Deep Learning) 기술을 기반으로 미국 정부기관이나 민간커뮤니티가 공개한 방대한 데이터를 활용해 약물과 질병과의 연결고리를 예측하는 방식이다.
송상옥 이사가 스탠다임AI가 탑재된 컴퓨터를 활용해 대형 모니터에 AI가 작업하는 과정을 구현했다. 모니터에는 알파벳과 숫자가 조합된 비규칙적인 문구가 빠른 속도로 쏟아졌다. 개별 문구의 결과값은 ‘1, 3, 5, 6’과 같은 숫자로 제시된다. 이 숫자들은 질병을 의미한다. AI의 분석에 따라 A라는 약물이 1, 3, 5, 6 등 4개의 질병 치료가 가능하다고 예측한 것이다.
AI는 수많은 약물이 어떤 질병에 사용되는지에 대한 정보가 학습돼 있기 때문에 기존 약물들의 공통된 패턴을 찾아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낸다. 1, 3, 5, 6 중에 1이 이미 해당 약물이 사용 중인 영역일 경우 3, 5, 6은 아직 연구자들이 찾아내지 못한 A약물의 새로운 적응증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송 이사는 “AI는 기존에 발표된 연구를 기반으로 예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약물이 세포, 유전자 등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분석해 새로운 가능성을 예측한다”라고 설명했다. AI가 약물이 지닌 분자구조와 방대한 양의 세포, 단백질, 유전자 등의 정보를 분석해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용도를 예측한다는 얘기다. 부작용 등의 이유로 이미 퇴출된 의약품도 새로운 영역에서 부활시킬 수도 있다.
AI가 단순히 기존에 공개된 정보를 검색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거나 약물의 작용기전을 통해 직관적으로 추론하는 것은 아니다. AI는 A약물이 왜 3, 5, 6의 질병에 사용할 수 있다고 예측했는지 근거를 제시한다. 약물이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작용기전으로 질병 치료 가능성을 찾아냈는지를 설명한다.
송 이사는 “AI는 데이터로부터 의미있는 패턴을 찾아내 특정 약물이 새로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예측하면서 유전자, 단백질 등의 정보가 어떤 작동원리를 통해 질병 치료 영역에 도달하는지를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유전자, 질병, 약물 등의 정보를 통합·구축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한다”면서 “데이터 특성마다 적용하는 알고리즘은 모두 다르다. 스탠다임AI는 개별 정보에 맞는 최신 기법을 선별해 검증과 해석을 한다”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AI가 전문가를 흉내내 연구를 확장해서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대신 인간의 능력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광범위한 정보를 빠르게 파악한다”고 말했다.
송 이사는 “수많은 임상전문가가 수십년의 노하우를 통해 연구를 진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인간은 모든 정보를 학습할 수 없기 때문에 일부 분야에 전념하지만 AI는 전 분야 학습을 기반으로 전문가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가능성을 발굴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AI는 인간과는 달리 편견이 없다는 점도 장점으로 지목된다. 김 대표는 “오랫동안 한 영역에서 연구한 과학자들은 무의식 중에 편견을 가질 수 있지만 AI는 모든 편견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연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AI가 새로운 신약 개발 가능성을 제시한다면 이는 제약산업에서는 의미있는 성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신약개발에 투입되는 10년 이상의 기간과 천문학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신약개발을 위해 겪었던 시행착오도 AI가 획기적으로 줄여줄 수 있다.
그렇다면 AI가 도출한 결과를 신뢰할 수 있을까? 송 이사는 “AI가 도출한 결과에 대해 실제 실험 이전에 답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은 아직 세상에 없다”면서도 “신뢰성은 높은 것으로 예상된다”고 답했다. AI의 신뢰도를 장담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김 대표는 “실제로 기존에 알고 있는 정보를 AI를 통해 뽑아냈을 때 예상한 결과가 나왔다. 이는 AI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같은 부품으로 조립한 휴대전화도 어떻게 조립하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면서 “기계학습 관점에서 보면 양질의 데이터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고, 알고리즘이 패턴을 잘 찾아내는냐가 성패의 관건이다. 신약개발이라는 목적에 가장 근접한 결과를 찾아내는 것이 스탠다임AI의 목표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AI가 새로운 약물의 용도를 예측하면 다음은 크리스탈지노믹스의 몫이다. 크리스탈은 스탠다임이가 제시한 신약 리스트 중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 약물에 대해 동물실험을 통해 검증작업을 진행하고 결과에 따라 사람을 상대로 본격적인 임상시험에 착수할 예정이다.
크리스탈지노믹스 측은 스탠다임AI를 활용한 신약 개발에 큰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스티브김 크리스탈 이사는 “AI가 이미 존재하는 약물을 활용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는 시스템이지만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영역에서 사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내면 혁신신약(퍼스트인클래스, First-in-class)을 개발할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
이미 사용 중인 약물이라는 점에서 독성 문제에서 자유롭다는 이점이 있다. 크리스탈은 AI가 내놓은 약물 리스트 중 상업성과 특허문제 등을 검토해 본격적인 임상단계에 진입하겠다는 복안이다.
정인철 크리스탈 부사장은 “우선적으로 AI를 활용한 신약 과제를 파이프라인에 추가하는 것이 목표다. 최대한 빠른 시일내 성과를 낼 계획이다”고 강조했다.
지난 2015년 설립된 스탠다임은 AI를 활용한 신약개발 영역에서 국내 최고의 실력을 갖췄다고 자평한다. 김 대표는 인공지능과 머신러닝 기술을 오랫동안 연구했다. 송 이사와 윤소정 이사는 화학생물공학과 시스템생물학ㆍ생물정보학 전문가다.
스탠다임 공동 창업자들은 삼성종합기술원에서 딥러닝을 활용해 컴퓨터상에서 DNA가 손상되고 복원되는 시뮬레이션 연구를 진행하다 이 프로젝트가 종료되자 창업을 결심했다. 스탠다임은 2015년 케이큐브벤처스로부터 3억원의 투자를 유치했고 케이큐브벤처스, LB인베스트먼트 등에서 총 34억원의 투자를 받았다.
스탠다임은 지난해 영국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가 개최한 AI 신약 개발 경쟁 프로그램 '드림 챌린지'에서 70여개 참가팀 중 3위를 차지하며 가능성을 과시했다. 스탠다임이 크리스탈과 손 잡은 이유에 대해 김 대표는 “크리스탈이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라고 했다. 사실 국내 10여개 제약사와 협의를 진행했지만 대부분 불투명한 사업 전망을 이유로 사업 제휴를 결정하지 않았다.
스탠다임은 최근 실제 의료 정보를 활용한 신약개발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최근 아주대의료원과 업무협력을 맺고 의료정보를 활용한 임상시험과 신약개발에 필요한 AI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
김 대표는 “전 세계적으로 AI를 활용한 신약개발은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누가 더 잘한다고 판단하기에는 시기상조이지만 스탠다임이 리딩 플레이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면서도 “사실 AI를 활용한 신약개발은 아직까지는 불확실한 영역이지만 AI도 지속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만큼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