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스펙테이터 천승현 기자
시계를 10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지난 2007년 한미FTA 협상이 진행될 당시 의약품 산업은 농업과 함께 우리 측이 양보하는 카드로 분류됐다. 협상 안건 중에 의약품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하는 내용이 대거 반영됐는데 의약품의 특허 보호가 강화되면 오리지널 의약품보다는 복제약(제네릭) 의존도가 높은 국내 제약업체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한미FTA 타결로 국내 제약업계에서 가장 경계했던 변화는 '허가·특허 연계 제도'의 도입이다. 허가·특허 연계제도는 제네릭 허가를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와 연계해서 내주는 제도다.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제네릭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존 의약품 허가제도에서 제약사들은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와 무관하게 제네릭의 허가를 받고, 특허 침해여부는 당사자간의 소송을 통해 해결했지만 특허 문제의 해결 여부도 의약품 허가 절차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셈이다.
허가·특허 연계 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은 ‘제네릭 판매금지’와 ‘우선판매품목허가’ 두 가지로 압축된다. 각각 오리지널 업체와 제네릭 업체에 제공하는 혜택이다.
판매금지는 특허권자를 보호하기 위해 특허소송 기간 동안 제네릭의 판매를 금지하는 조치다. 식약처는 최초 제네릭 허가신청시 신청사실을 특허권자에게 통보하는데 이 때 특허권자가 제네릭 발매는 ‘특허 침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하면 해당 제네릭 판매는 9개월 동안 금지된다.
우선판매품목허가는 특허도전에 성공한 제네릭에 부여하는 혜택이다. 가장 먼저 특허도전에서 승소한 제네릭은 9개월 간의 독점 판매권(우선판매품목허가)을 확보하게 된다. 9개월 간 다른 제네릭의 진입 없이 해당시장에 오리지널 의약품과 1대1로 경쟁하는 구도가 만들어진다.
허가·특허 연계 제도가 시행되면 제네릭의 시장 진입 지연으로 국내제약업계가 심각한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우려가 나온 이유는 특허 소송 기간 동안 제네릭 판매 금지 조항 때문이다. 다국적제약사들의 무분별한 특허소송으로 제네릭 제품들은 발매가 지연되고 이는 국내제약사들의 매출 손실과 국민들의 약품비 부담 증가로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허가·특허 연계제도는 단계적인 도입 절차를 거쳐 지난해 3월15일부터 본격 시행됐다.
◇허가ㆍ특허 연계제도 본격 시행 이후 제네릭 발매 지연 미미
허가·특허 연계제도의 본격 시행된지 1년이 지난 상황에서 국내 제약산업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식약처는 최근 서울대 산학협력단과 함께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제도 영향평가’라는 제목의 연구보고서를 통해 이 제도의 중간 평가 결과를 내놓았다. 총 254쪽에 달하는 이 보고서를 보면 “아직까지는 허가·특허 연계제도가 국내 제약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우선 허가·특허 연계제도 본격 시행(2015년 3월15일)부터 2016년 5월31일까지 판매금지 현황을 보면 총 17건의 판매금지 신청이 청구됐고 이중 3건이 판매금지됐다. 취하는 3건, 거부 2건, 검토 중 9건으로 집계됐다.
다시 말하면 제네릭 허가 신청이 통보된 이후 오리지널 업체가 총 17건에 대해 특허 소송을 제기하며 제네릭의 판매금지를 요청했지만 단 3건에 대해서만 제네릭 판매금지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판매금지 3건은 ‘페브릭정40mg', '페브릭정80mg', ’타이가실주‘ 등 3개 제품의 제네릭이다. 허가·특허 연계제도 시행 이후 사실상 페브릭과 타이가실 2개 제품의 제네릭에 대해서만 특허소송에 따른 판매금지 조치가 이뤄진 셈이다.
이 중 판매금지가 종료되지 않아 판매금지 기간에 대한 분석이 불가능한 '타이가실'을 제외한 ’페브릭‘의 사례만 분석했다. 페브릭의 제네릭 19개의 판매금지 기간은 1.4개월에 불과했다. 원칙대로라면 최장 9개월간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지지만 판매금지 기간에 제네릭 제품들이 오리지널의 특허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심결을 받아 판매금지 처분의 효력이 소멸됐다.
‘제네릭 판매금지’는 국내 제약업계가 한미FTA를 반대했던 핵심 조항이다. 판매금지 기간 만큼 제네릭 시장이 지연되면 국내제약사들의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제네릭 판매금지 조항이 없다면 제약사들은 더 빨리 제네릭을 발매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당초 보건복지부는 "허가-특허 연계제도로 국내사들의 제네릭 시장 진입이 평균 9개월 정도 지연되고 이에 따라 연간 686억~1197억원의 생산 감소가 예상된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허가·특허 연계제도 시행 이후 제네릭 판매금지는 총 2건에 불과했고, 판매금지 기간도 길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 보고서에는 페브릭 제네릭의 1.4개월 판매금지로 제네릭 시장 진입이 지연돼 약품비 지출이 최소 1억7700만원에서 최대 3억4200만원 증가한 것으로 분석했지만 1개의 사례만으로 허가·특허 연계 제도의 변화를 분석하기에는 표본이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오리지널 의약품을 보유한 입장에서는 제네릭의 판매금지 조치로 얻는 실익이 크지 않아 적극적으로 판매금지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보고서에는 “판매금지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약가인하 방지나 시장점유율 측면에서 이익을 얻게 되지만 특허소송 진행 중에도 제네릭 의약품 허가 신청이 가능해 실제 판매금지 기간은 9개월보다 짧아 제네릭 진입 지연 효과가 크지 않다”고 진단했다.
미국의 경우 특허침해소송이 제기되면 FDA는 제네릭 허가 신청일로부터 30개월 이내에 허가를 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국내에서는 특허소송에 다른 제네릭 판매금지 기간이 최장 9개월에 불과할뿐더러, 판매금지 기간에도 제네릭 허가 검토는 진행되고 있어 사실상 제네릭 업체 입장에서는 국내에서의 제도가 미국에 비해 크게 유리한 상황이다.
특허도전 성공 제네릭 독점판매권 무더기 공유..특허소송 급증
제네릭 업체의 혜택 조항인 우선판매품목허가의 경우 제약사들이 동시다발로 가져갔다는 점이 이채롭다. 2015년 3월15일부터 2016년 5월31일까지 우선판매품목허가를 받은 의약품은 총 12개 성분 152개 품목으로 집계됐다. 우선판매품목허가는 특허 도전에 성공한 제네릭에 부여하는 독점판매권인데 성분별로 약 13개 업체가 독점권을 공유했다는 의미다.
‘암로디핀베실산염+로사르탄칼륨’ 복합제의 경우 무려 45개 제품이 우선판매품목허가를 획득했다. ‘독점판매권 혜택’이라는 당초 제도의 취지가 무색해진 것이다.
업계에서는 제약사들이 ‘특허소송 따라하기’ 전략을 구사하면서 우선판매품목허가도 공동으로 가져가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것으로 분석한다.
우선품목판매허가를 받으려면 ‘최초 특허심판 청구’와 ‘최초 허가신청’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특허심판의 경우 최초 심판으로부터 14일 이내에 청구하는 제네릭은 모두 가장 먼저 청구한 것으로 간주된다.
식약처는 특허심판청구 사실을 홈페이지에 공개하는데, 특정 의약품의 특허소송이 제기됐다는 소식에 다른 업체들도 우선판매품목허가를 공동으로 확보하기 위해 뒤늦게 특허심판에 가담하는 전략이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이 보고서에서도 “대다수의 대형 제약사는 제네릭 출시가 타사에 뒤처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특허심판을 먼저 진행하고 제네릭 의약품 개발 검토는 이후에 한다”면서 “특허도전 성공이 실제 제품 출시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어 현 제도 하에서는 특허심판이 불필요하게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국내제약사의 특허팀 관계자는 “가장 이상적인 특허전략은 단독으로 우선판매품목허가를 획득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경쟁사가 단독으로 우선판매권을 가져가는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우선품목판매허가를 받은 제품 중 상당수는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존속기간이 종료되지 않아 향후 특허 만료일 이후 판매가 가능한 자격을 받았다.
허가·특허 연계 제도 도입 이후 특허 관련 심판이나 소송이 급증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2015년 3월 15일부터 2016년 5월 31일까지 식약처에 통보된 특허심판은 총 1869건으로 조사됐다. 이 중 소극적권리확인심판이 319건(17.1%), 무효심판이 1063건(56.9%), 존속기간연장무효심판이 487건(26.1%)을 차지했다.
연도별 심판건수는 2014년 109건에서 2015년 2015년 1725건으로 제도 도입 이후 15배 이상 늘었다.
한미FTA 협상 당시 "국내제약사 막대한 손실 야기" 우려 기우
결국 허가·특허 연계 제도의 본격 시행 이후 국내제약사들은 당초 우려했던 제네릭 출시 지연 효과는 미미했고, 제네릭 판매 독점권도 공동으로 가져가는 경우가 많아 제도 시행 전후를 비교하면 특허소송만 늘었을 뿐 큰 변화는 발생하지 않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한미FTA 협상이 진행될 때 한국제약협회는 "허가·특허 연계로 인해 국내제약산업이 뿌리째 흔들리고 다국적사의 국내시장 점유 확대로 제약속국으로 전환될 소지가 크다"고 우려했지만 현재까지는 기우에 불과하다는 분석이다.
국내업체들이 특정 영역에는 100개 이상의 제네릭을 내놓을 정도로 제네릭 시장 진입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을 뿐더러 제도 도입 과정에서 제네릭 업체의 손실을 줄이기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한 '한국형 허가ㆍ특허 연계제도'를 시행하면서 제네릭 시장은 예전과 같이 과열경쟁구도가 지속된 것으로 분석된다.
업계 한 관계자는 “허가·특허 연계 제도의 도입으로 제약사들이 특허 전담팀을 꾸려 대응한 결과 전체적으로 특허 전략이 상향 평준화됐다고 볼 수 있다”면서 “제도 시행 이전에도 특허 종료일이 10년 이상 남아도 제네릭을 허가받는 등 제네릭 허가 속도전을 펼쳤고 향후 특허만료를 앞둔 대형 오리지널 의약품도 많지 않아 제약사 입장에서는 제네릭 허가 절차만 조금 복잡해졌을 뿐 과거와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다”고 분석했다.
이남희 식약처 의약품허가특허관리과장은 “아직 본격적인 허가·특허 연계제도 시행 기간이 길지 않을뿐더러 판매금지와 우선판매품목허가 사례가 많지 않아 국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진단하기에는 시기적으로 이르다. 향후 사례가 많이 축적된 이후 영향평가를 다시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