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스펙테이터 천승현 기자
다국적제약사와 국내제약사들은 연구개발(R&D)부터 영업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협력 관계를 유지한다. 국내제약사는 다국적제약사에 신약 기술을 수출해 해외 시장 진출을 도모하고, 다국적제약사는 자사 제품을 한국 시장에서 국내제약사와 공동으로 판매하며 시너지를 낸다. 하지만 최근에는 국내제약사들의 성장동력 고갈로 인해 다국적제약사와의 수평적 관계가 깨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공동 판매 1~2년 만에 영업 파트너를 교체하는 사례도 속출하며 국내사들이 '영업 도우미'가 아닌 '영업 소모품'으로 전락했다는 우려도 확산되는 추세다.
◇다국적제약사들, 공동판매 파트너 수시 교체..1년만에 판권 회수도
16일 업계에 따르면 릴리는 SK케미칼과 우울증치료제 ‘심발타’의 공동판매 계약을 맺었다. 심발타는 우울증 뿐만 아니라 골관절염 치료에도 사용되는 약물이다. 지난해 처방실적은 122억원이다. 릴리는 주요 우울증 및 범불안장애 관련 적응증에 대한 마케팅과 영업활동을 전담하고 SK케미칼은 골관절염 치료 영역에서 심발타의 영업을 담당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나눴다.
기존에 릴리는 지난 2013년 11월부터 CJ헬스케어와 심발타를 공동 판매했다. 특허만료를 앞둔 시점에서 CJ헬스케어와 손 잡고 제네릭(복제약) 제품으로부터 시장을 방어하기 시작했지만 3년 만에 파트너를 교체했다.
최근에는 다국적제약사들의 영업 파트너 교체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화이자는 지난 2014년 3월부터 안국약품과 발기부전치료제 ‘비아그라’의 공동 판매를 시작했지만 불과 2년 만인 최근 제휴 관계를 청산했다. 화이자는 제일약품에 비아그라의 유통을 맡겼고 내년부터는 공동으로 영업을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제일약품은 현재 화이자의 간판 제품 ‘리피토’, ‘쎄레브렉스’ 등도 판매 중이다. 제일약품은 비아그라 제네릭 '포트테라'를 판매 중이지만 오리지널 의약품 판매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안국약품은 지난 2011년부터 아스텔라스의 전립선비대증치료제 ‘하루날디’와 배뇨장애치료제 ‘베시케어’의 공동 영업을 담당했지만 지난달부터 아스텔라스는 파트너를 보령제약으로 바꿨다. 보령제약은 지난 2012년 BMS의 B형간염치료제 ‘바라크루드’ 판매를 시작했지만 1년만에 제휴 관계를 청산한 바 있다. 지난해부터 녹십자가 바라크루드의 유통과 판매를 담당하고 있다.
한미약품도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흡입용 천식약 ‘세레타이드’를 판매하다 1년만에 판권을 되돌려준 경험이 있다. 세레타이드의 판권은 동아에스티로 넘어갔다가 최근에는 다시 GSK가 회수했다.
노바티스의 당뇨약 ‘가브스’의 경우 한독(2009년)을 거쳐 한미약품(2014년)이 판매했지만 최근에 한미약품의 공동판매도 중단됐다. MSD의 당뇨약 ‘자누비아’, 고지혈증약 ‘바이토린’·‘아토젯’ 등의 판매 제휴 업체는 올해 초 대웅제약에서 종근당으로 넘어갔다. 아스트라제네카의 고지혈증치료제 ‘크레스토’는 2014년부터 유한양행이 영업을 진행하다 2년만인 지난 4월 대웅제약으로 영업 파트너가 교체됐다.
오랫동안 판매 제휴를 유지한 제품도 판권 회수나 파트너 교체는 빈번하게 일어난다.
보령제약은 지난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BMS와 업무제휴로 탁솔을 판매해왔지만 계약 종료로 탁솔의 판권은 BMS가 회수했다. 보령제약은 올해 초 삼양바이오팜이 지난 2001년 개발한 탁솔의 복제약(제네릭) ‘제넥솔’ 판매에 나섰다.
대웅제약은 지난 2000년부터 이탈리아 제약사 이탈파마코로부터 뇌기능개선제 ‘글리아티린’의 원료의약품을 공급받아 국내에서 완제의약품을 생산·판매했지만 올해부터 종근당에 원료의약품과 상표명 사용권한을 종근당에 넘겨줬다. 종근당이 판권을 가져간 MSD의 ‘자누비아’도 대웅제약이 2008년부터 7년 동안 판매했다.
CJ헬스케어는 지난 2011년 한국MSD와 합의 하에 천식치료제 ‘싱귤레어’의 포장만 바꾼 ‘루케어’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루케어는 지난해 130억원어치 처방되며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했지만 지난 8월 한국MSD는 판권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국내사들, CSO 등에 밀려 성장동력 고갈..다국적사에 구애 쇄도
물론 제품의 특성에 따라 적절한 제휴 업체를 찾아나서는 것은 문제는 아니다. 릴리가 심발타의 골관절염 치료영역을 SK케미칼에 맡긴 배경은 SK케미칼이 '조인스'를 판매하면서 관절염 처방 영역에서 탁월한 장점을 갖고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서다.
하지만 동일한 제품에 대해 잦은 판매 제휴사 교체는 영업전략 측면에서 실익이 크지는 않아 보인다. 다국적제약사 입장에선 오랜 기간 제휴 업체가 특정 제품을 판매하면서 쌓은 노하우와 지식을 새로운 파트너에 단기간에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판권을 회수당한 국내업체 입장에선 신약을 판매하면서 투입한 영업비용과 노력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셈이 된다.
실제로 지난 2011년 한올바이오파마는 8년 동안 았던 수액제 판권을 원 개발사 박스터가 회수하자 “재계약 거절이 부당하다”고 소송을 내면서 계약기간 동안 영업조직을 신설하고 막대한 영업비용을 투입했다는 점을 판권 유지의 이유로 제시했다.
업계에서는 새로운 성장동력이 부족한 국내제약사들이 동시다발로 다국적제약사에 공동판매 구애에 나서면서 파트너 교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특히 신약 성과가 부족한 국내업체들은 제네릭 판매로 외형을 확대해왔는데 최근에는 제네릭 실적도 신통치 않은 상황이다. 지난 2012년 약가제도 개편으로 특허 만료 후 신약 보험약가가 제네릭가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져 제네릭의 가격 경쟁력도 약화된 상태다.
최근에는 전문 영업 대행 업체(CSO, Contract Sales Organization)들의 제네릭 시장 장악력이 높아지면서 제약사들의 제네릭 판매가 위축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CSO는 제약사가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특정 제품의 영업을 전담하는 업체다. 주로 제약사 영업사원 출신으로 구성됐다.
제네릭 영업의 경우 영업망이 구축되지 않은 영세업체들은 CSO에 영업을 전담하는 경우가 많다. CSO가 오랫 동안 신뢰도를 쌓은 거래처를 중심으로 영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자체 영업인력이 새로운 고객을 확보하는 것에 비해 효율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제약사들의 과도한 외형 확대 욕심도 신약의 판권 교체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현재 대다수의 공동판매는 국내업체가 다국적제약사로부터 제품을 구매해 유통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영업 성과에 따라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받는 방식이다. 공동판매 형식이지만 국내제약사 입장에선 판매금액의 100%를 매출에 반영되는 효과가 있다.
유통 과정을 보면 ‘다국적제약사→도매상→요양기관’에서 ‘다국적제약사→국내제약사→도매상→요양기관’으로 한 단계 늘었을 뿐이지만 국내업체도 다국적제약사와 같은 규모의 매출을 올리게 되는 구조다.
국내제약사 한 영업본부장은 “비즈니스 관계에서 보다 높은 성과를 기대하기 위해 파트너를 교체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최근 성장동력이 고갈된 국내업체들이 적극적으로 다국적제약사에 판권을 요청하면서 사실상 공동판매로 남는 게 없는 수준까지 계약 조건이 열악해졌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