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스펙테이터 천승현 기자
한미FTA 발효 이후 지난 5년간 미국 의약품 수입이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미FTA로 인한 의약품 산업의 손실이 현실화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국내 의약품의 미국 수출 증가율과 지적재산권 영역에서의 미미한 손실을 감안하면 현재로서는 한미FTA로 인한 의약품 산업의 영향을 진단하기엔 무리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미국 의약품 수입량 급증했지만 수출 성장률도 동반상승..FTA 영향 여부 물음표
한국무역협회는 최근 ‘한미FTA 5주년 평가와 시사점’ 보고서를 내고 한미 FTA 발효 이후 한국과 미국간의 교역 및 한국의 대 세계 교역의 변화 추이를 분석했다.
무역협회는 한미FTA 발효 이후 5년 동안 세계 교역과 한국의 대세계 교역의 연평균 증가율이 각각 -2.0%, -3.5%를 기록하며 감소세를 보인 반면 한미 교역은 연 평균 1.7% 증가하면서 한미FTA가 양국 교역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고 진단했다.
미국의 한국 수입시장 점유율은 FTA 발효 전인 2011년 8.50%에서 지난해 10.64%로 2.14%포인트 상승했고, 한국의 미국 수입시장 점유율도 같은 기간 2.57%에서 3.19%로 0.62%포인트 상승했다는 점이 그 근거다. 무역협회는 “양국 모두 FTA를 통한 호혜적 성과를 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라고 분석했다.
세부영역별 변화를 살펴보면 희비가 엇갈린다. 자동차 부품 수출은 연평균 8.0% 늘었다. 전기전자는 연 평균 5.6% 증가하며 일본(1.3%), 중국(3.8%), 대만(3.2%)에 비해 양호한 성과를 달성했다. 이에 반해 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의약품은 연 평균 12.9% 증가하며 손실이 큰 산업군으로 분류됐다.
이 보고서가 공개한 수치만 보면 '한미FTA 발효 이후 미국과의 교역에서 의약품 부문은 손실을 감수했지만 다른 사업에서는 수혜를 입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한미FTA 협상 당시 우리 측이 양보하는 카드로 농업과 함께 의약품 산업을 지목했는데, FTA 발효 이후 손실이 현실화했다는 얘기가 된다.
과연 한미FTA 발효 이후 국내 의약품 산업은 미국에 내주기만 했을까. 다른 주요 지표를 들여다보면 손실로 단정짓기엔 근거가 취약해보인다.
우선 한국의 의약품 수입 동향을 보면 앞서 소개한대로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의약품(MTI 품목분류 기준)은 연 평균 12.9% 늘었다. 지난해 미국에서 수입한 의약품은 11억2000만달러 규모로 한미FTA 발효 전 2011년 6억1000만달러보다 83.6% 늘었다. 전 세계(39.0%), EU(27.5%), 일본(4.4%) 등에 비해 미국산 의약품 수입의 증가율이 높았다.
의약품 수출 동향을 보면 미국에 수출된 의약품은 2011년 3000만달러에서 지난해 7000만달러로 133.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입 증가율(83.6%)을 웃도는 수치다. 다른 국가에 비해 미국 의약품의 수입 증가율이 높았지만 국내 의약품의 미국 수출 증가율을 적용하면 미국과의 의약품 교역에서 한국이 더 실리를 챙겼다는 얘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수입 규모가 수출 규모보다 16배 이상 크기 때문에 단순히 성장률만으로 누가 더 실리를 챙겼는지 단정짓는 것은 위험한 판단이다.
무역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의약품 수출 규모는 2011년 12억7000만달러에서 2016년 27억4000만달러로 115.7% 늘었다. 수입 증가율 39.0%를 압도한다. EU 수출은 같은 기간 1억2000만달러에서 8억5000만달러로 608.3%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국내산 의약품 수출의 높은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수입 규모가 수입량을 압도하는 탓에 전 세계 의약품 무역수지는 2011년 29억6000만달러 적자에서 지난해 31억4000만달러로 소폭 확대됐다. 국가별 의약품 무역수지를 살펴보면 미국과의 무역적자가 5억8000만달러에서 10억5000만달러 81.0% 늘었을 뿐 일본과 EU는 적자 폭이 축소됐거나 종전 수준을 유지한 것으로 집계됐다.
대 미국 의약품 무역은 수입에 비해 수출 성장률이 높았지만 양국간 교역 규모의 차이로 무역수지는 다른 국가에 비해 악화됐다는 진단이 나온다. 이 수치만으로는 한미FTA 발효 이후 미국과의 의약품 무역에서는 다소 손실이 커졌다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의약품 수출입 규모의 동향만으로 한미FTA의 영향을 평가하기는 무리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한미FTA와 수출입량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기 힘들 뿐더러 지적재산권 영역에 대한 평가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2011년 보건당국은 한미FTA가 국내 의약품 산업에 10년 연 평균 686억~1197억원의 기대매출 감소를 추정했다. 관세 철폐와 지적재산권 보호 강화로 신약보다 복제약(제네릭) 의존도가 높은 국내 제약업계는 적잖은 손실이 불가피하다는 이유에서다.
한미 양국은 단계적으로 의약품 관세를 철폐하기로 합의했는데, 이론상으로는 수출보다 수입 규모가 큰 국내 의약품 산업에서는 관세 철폐는 손실로 이어진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정부가 의약품 가격을 통제하기 때문에 관세 철폐로 인한 영향은 미미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욱이 국내에서는 2006년부터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시행하면서 강력한 약가 인하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관세 철폐로 국내에 들여오는 의약품의 가격이 낮아지더라도 보건당국은 더 낮은 가격으로 인하해야 건강보험 급여를 인정해주기 때문에 관세 철폐는 시장 경쟁력과는 무관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5년간 한국과 미국간 의약품 교역 규모의 변동은 한미FTA의 영향과 연관성이 크지 않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오히려 양국 제약사가 내놓은 신약의 경쟁력, 보험약가 제도의 변화 등이 영향력이 더 크다는 지적이다.
◇우려했던 지적재상권 강화 여파도 미미..중장기 영향평가 필요성
한미FTA 발효 이후 의약품 산업의 손실을 추정하려면 지적재산권 강화에 따른 변화를 파악해야 하는데 아직 시기상조라는 지적이 나온다. 허가·특허연계제도는 3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지난 2015년에 본격 시행됐다.
정부는 관세 철폐보다는 허가·특허연계제도로 대표되는 지적재산권 강화에 따른 손실이 더 큰 것으로 지목됐다. 보건당국은 허가·특허연계제도 도입으로 연 평균 439억~950억원의 손실을 추정했다.
허가·특허 연계제도는 제네릭 허가를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와 연계해서 내주는 제도다.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제네릭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존 의약품 허가제도에서 제약사들은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와 무관하게 제네릭의 허가를 받고, 특허 침해여부는 당사자간의 소송을 통해 해결했지만 특허 문제의 해결 여부도 의약품 허가 절차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허가·특허 연계 제도가 시행되면 국내제약업계가 심각한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우려가 나온 이유는 특허 소송 기간 동안 제네릭 판매 금지 조항 때문이다. 다국적제약사들의 무분별한 특허소송으로 제네릭 제품들은 발매가 지연되고 이는 국내제약사들의 매출 손실과 국민들의 약품비 부담 증가로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허가·특허 연계제도 시행에 따른 영향은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지난해 말 내놓은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제도 영향평가’에서 엿볼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식약처가 서울대 산학협력단과 공동으로 작성했다.
허가·특허 연계제도 본격 시행(2015년 3월15일)부터 2016년 5월31일까지 판매금지 현황을 보면 총 17건의 판매금지 신청이 청구됐고 이중 3건이 판매금지됐다. 취하는 3건, 거부 2건, 검토 중 9건으로 집계됐다.
판매금지 3건은 ‘페브릭정40mg', '페브릭정80mg', ’타이가실주‘ 등 3개 제품의 제네릭이다. 허가·특허 연계제도 시행 이후 사실상 페브릭과 타이가실 2개 제품의 제네릭에 대해서만 특허소송에 따른 판매금지 조치가 이뤄진 셈이다.
이 중 판매금지가 종료되지 않아 판매금지 기간에 대한 분석이 불가능한 '타이가실'을 제외한 ’페브릭‘의 사례만 분석했다. 페브릭의 제네릭 19개의 판매금지 기간은 1.4개월에 불과했다. 원칙대로라면 최장 9개월간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지지만 판매금지 기간에 제네릭 제품들이 오리지널의 특허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심결을 받아 판매금지 처분의 효력이 소멸됐다.
이 보고서에는 페브릭 제네릭의 1.4개월 판매금지로 제네릭 시장 진입이 지연돼 약품비 지출이 최소 1억7700만원에서 최대 3억4200만원 증가한 것으로 분석했지만 1개의 사례만으로 허가·특허 연계 제도의 변화를 분석하기에는 표본이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보고서는 “판매금지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약가인하 방지나 시장점유율 측면에서 이익을 얻게 되지만 특허소송 진행 중에도 제네릭 의약품 허가 신청이 가능해 실제 판매금지 기간은 9개월보다 짧아 제네릭 진입 지연 효과가 크지 않다”고 진단했다.
미국의 경우 특허침해소송이 제기되면 FDA는 제네릭 허가 신청일로부터 30개월 이내에 허가를 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국내에서는 특허소송에 다른 제네릭 판매금지 기간이 최장 9개월에 불과할뿐더러, 판매금지 기간에도 제네릭 허가 검토는 진행되고 있어 사실상 제네릭 업체 입장에서는 국내에서의 제도가 미국에 비해 크게 유리한 상황이다.
허가·특허 연계 제도 시행 기간이 짧을뿐더러 미국에 비해 제네릭에 다소 유리한 제도가 도입되면서 당초 우려했던 손실은 미미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중장기적으로 한미FTA 발효에 따른 의약품 산업의 영향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욱이 한미FTA 타결 당시와는 달리 국내제약사들은 신약개발 능력 향상으로 글로벌시장에서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놓은 상태다. 과거와는 위상이 달라졌다는 의미다. 허가ㆍ특허 연계제도로 인한 영향이 미미한 이유 중 하나로 국내제약사들의 효과적인 대응 전략이 꼽히기도 한다.
정윤택 제약산업전략연구원 대표는 “한미FTA 발효 이후 국내외 시장에서 국산신약의 영향력이 확대돼 당초 우려했던 대규모 손실 우려는 다소 희석된 측면이 있다”면서도 “특히 지적재산권과 같은 비관세 영역의 경우 영향을 미치는 외부요인이 많기 때문에 추후 중장기적으로 영향평가를 진행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