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스펙테이터 천승현 기자
공정거래위원회가 다국적제약사와 국내제약사간 뒷거래를 통한 제네릭 고의 지연 행위를 집중 감시한다. 업계에서도 약가제도의 변화, 허가특허연계제도 도입 등의 영향으로 은밀한 뒷거래 가능성이 있다는 시각이 팽배하다.
공정위는 지난 26일 제약사의 경쟁제한 행위에 대한 실태점검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공정위가 겨냥하는 경쟁제한 행위는 '역지불 합의'(pay-for-delay)다. 역지불 합의는 신약 특허권을 보유한 오리지널 제약사가 제너릭(복제약) 제조사에 시장 진입 포기를 조건으로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는 불공정행위다.
앞서 공정위는 올해 초 업무보고에서도 역지불합의에 대한 집중 점검 의지를 밝힌 바 있다. 역지불합의는 제네릭의 발매를 지연시켜 국민들의 약값 부담을 가중시킨다는 점에서 중대한 위법행위라는 판단에서다. 미국의 경우 역지불합의로 인해 제네릭 출시가 평균 5~9년 지연되면서 소비자 피해액이 연간 35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공정위는 추산했다.
이미 공정위는 다국적제약사 39곳, 국내제약사 32곳을 대상으로 역지불합의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국내 의약품 시장에서 역지불합의 가능성이 있을까. 동일 시장에 수십개의 제네릭이 등장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특정 제약사간의 뒷거래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하지만 제약사들의 열악한 신약개발 능력, 신제품 고갈, 허가특허연계제도 등 시장 환경을 고려하면 은밀한 유혹은 적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우선 제네릭이 발매되면 오리지널 의약품의 약가가 반토막나는 약가제도가 역지불합의를 유혹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국내 보험약가제도에서 제네릭이 발매되면 오리지널 의약품의 보험상한가는 자동으로 30% 떨어진다. 제네릭 발매 1년 뒤에는 종전의 53.55% 수준으로 내려간다.
약가인하는 매출 손실을 의미한다. 오리지널 의약품을 보유한 업체 입장에선 제네릭의 시장 잠식보다는 약가인하로 인한 매출 타격이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오리지널 업체가 다양한 후속특허를 등록하고 전방위 특허소송을 통해 제네릭 발매 저지에 총력을 기울이는 이유다.
예를 들어 제네릭을 허가받고도 특별한 사유 없이 약가 등재를 미루는 경우 역지불합의를 의심할 수 있다. 제네릭 출시를 계획했다가 다국적제약사와의 뒷거래로 출시 계획을 철회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통상 역지불합의의 대가로 다국적제약사가 국내제약사에 오리지널 의약품의 공동판매 권한을 부여하는 방식이 구사된다.
지난 2011년 공정위는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이 동아에스티(옛 동아제약)와 역지불 합의를 통해 제네릭의 시장 진입을 차단했다며 양사에 총 51억원 규모의 과징금을 부과한 바 있다. GSK는 지난 1998년 동아제약이 항구토제 '조프란'의 제네릭 ‘온다론’을 출시하자 이듬해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양사는 타협을 거쳐 특허분쟁을 종결했는데, 이때 동아제약은 GSK로부터 신약판매권과 인센티브 등을 받고 제네릭 출시 계획을 철회했다.
국내사 입장에서도 시장성이 불투명한 제네릭을 판매하는 것보다는 일정 규모의 매출이 보장된 신약 판매를 선호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최근 새로운 성장동력이 절실한 국내사들은 신약 판권을 따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상황이다.
국내사 한 관계자는 “이미 특허가 만료돼 제네릭 시장이 형성된 제품이라도 다국적제약사가 영업 파트너를 물색한다는 소문이 나면 최소 5곳 이상의 국내사들이 러브콜을 보내는 실정이다”라고 토로했다. 실제로 지난해 국내에서 처방실적 1~3위를 기록한 ‘비리어드’(길리어드-유한양행), ‘리피토’(화이자-제일약품), ‘바라크루드’(BMS-녹십자) 등 3개 제품 모두 원개발 다국적제약사와 국내사가 공동으로 판매를 전개 중이다.
지난 2015년부터 본격 시행된 허가특허연계제도도 역지불합의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공정위는 의심한다.
한미FTA 발효로 도입된 허가·특허 연계제도는 제네릭 허가를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와 연계해서 내주는 제도다.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제네릭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장 먼저 특허도전에서 승소한 제네릭은 9개월 동안 제네릭의 진입 없이 해당시장에 오리지널 의약품과 1대1로 경쟁하는 ‘우선판매품목허가’라는 혜택을 받는다.
허가특허연계제도의 본격 시행 이후 이미 국내 제약업계는 ‘특허분쟁 천국’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지난 2014년부터 초 2200여건의 특허심판이 청구됐다. 가·특허연계제도가 본격 시행된 2015년에는 무려 1734건의 특허소성이 진행됐다. 이중 3월과 4월에만 무려 1563건의 특허 소송이 집중됐다.
제약사들이 우선판매품목허가를 획득하거나 경쟁사에 뺏기지 않기 위해 무더기 특허 분쟁을 제기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공정위는 특허분쟁을 제기한 이후 취하한 경우 역지불합의를 의심한다. 특허분쟁을 통해 제네릭 발매를 시도했다가 다국적제약사와 뒷거래를 통해 제네릭 발매 계획을 철회할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특허심판 제기 이후 소를 취하한 사례가 속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위는 2010년부터 식약처 허가를 받아 국내 판매를 시작한 주요 전문의약품 관련 특허 출원, 계약 및 분쟁 현황 등을 파악하고 있다. 제약사간 특허분쟁 현황, 특허 분쟁 중 소취하, 합의, 중재 내역 등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볼 계획이다.
그동안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과거에도 역지불합의가 의심되는 사례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이른바 '약가알박기'가 대표적이다.
2012년 약가제도 개편 이전에는 제네릭의 약가는 등재 시기에 따라 점차적으로 낮아지는 ‘계단형 약가제도’가 운영됐다. 가장 먼저 약가를 받은 제네릭은 오리지널 의약품 약가의 54.4~68%까지 받을 수 있고 다음달에는 최고가는 10%씩 인하되는 방식이었다. 물론 제약사의 의도에 따라 더 낮은 가격으로 등재할 수도 있다.
가장 먼저 등재되는 제네릭이 상식 이하의 보험약가를 받을 경우 후발 제네릭의 가격은 더 낮아지기 때문에 수익성 문제로 제네릭 시장 진입을 포기하는 사례가 발생한다. 만약 오리지널 업체와 뒷거래를 통해 낮은 제네릭 가격으로 등재했다면 이는 역지불합의에 해당한다.
실제로 일부 시장에서는 최초 등재 제네릭이 오리지널 의약품의 20~30% 수준의 약가를 받으면서 ‘약가알박기’ 의심을 받는 사례가 속출했다. 오리지널 의약품을 보유한 업체가 제네릭을 수탁 생산해주면서 '약가알박기'를 시도한다는 의혹의 눈초리도 지속적으로 제기된 바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신약을 보유한 업체 입장에선 제네릭의 발매는 치명적인 손실로 이어지고 제네릭 업체들은 과당 경쟁으로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이 절실하다는 이유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업체간 뒷거래 의심은 끊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지난 몇 년간 허가특허연계제도의 도입 등 시장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제약사들의 제보, 특허분쟁 등을 면밀히 살펴 시장 질서를 교란시키는 행위를 중점적으로 점검하겠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