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스펙테이터 천승현 기자
녹십자가 혈우병치료제의 미국 시장 진출을 포기했다. 환자 모집이 여의치 않아 임상시험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차세대 제품을 개발해 미국 시장을 다시 두드리겠다는 복안이다.
13일 녹십자는 글로벌 전략과제에 대한 사업 진단 결과 유전자 재조합 A형 혈우병 치료제 ‘그린진에프’의 미국 임상을 중단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녹십자 측은 “미국 임상 기간을 당초 2~3년 정도로 예상했지만 희귀질환의 특성상 신규 환자 모집이 더디게 진행돼 임상이 계획보다 지연됐다”면서 “투자비용 증가와 출시 지연에 따른 사업성 저하로 이어지기 때문에 미국 임상을 더 이상 강행하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녹십자는 지난 2012년 그린진에프의 미국 임상시험에 착수했지만 아직 완료하지 못한 상태다. 이와 관련 지난 2010년 녹십자는 미국 바이오의약품 유통기업 ASD 헬스케어와 총 4억8000만달러 규모의 `아이비글로불린에스엔`과 `그린진에프`의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임상시험 기간이 당초 계획보다 지연되자 지난해 9월 ASD헬스케어와의 양해각서도 해지됐다. 그리진에프의 미국 임상시험에는 수백억원이 투입된 것으로 전해졌다. 아이비글로불린에스엔은 현재 미국 식품의약품국(FDA)에 허가를 신청한 상태다.
혈우병치료제의 미국 시장 진입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녹십자는 차세대 혈우병치료제를 개발, 재도전하겠다는 입장이다.
녹십자는 약효 지속기간을 크게 늘린 차세대 장기지속형 혈우병 치료제로 미국 시장 문을 다시 두드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미 기존 약물보다 약 1.5~1.7배 약효 지속기간을 늘린 혈우병 치료제가 미국 시장에 출시되고 있지만, 녹십자는 경쟁 약물보다 최대 2배(기존약물 대비 3배) 지속되는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개발 속도를 끌어 올린다면 충분히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다는 게 녹십자 측 설명이다.
녹십자는 이번에 그린진에프의 미국 임상시험을 중단하는 대신 중국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지난 7월 그린진에프의 중국 임상시험 승인을 받고 2018년 종료를 목표로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회사 측은 “이미 20여년 동안 혈액제제 사업을 중국에서 영위하면서 쌓아온 현지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다”며 중국 시장에서의 성공을 자신했다. 녹십자의 중국공장에서 생산되는 혈장 유래 A형 혈우병 치료제는 지난해 기준으로 중국 전체 관련 시장 점유율이 35.5%로 1위를 차지했다.
중국 혈우병치료제 시장 규모는 1000억원에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향후 성장 가능성은 높다는 게 녹십자의 판단이다. 중국 시장은 유전자 재조합제제 중심의 글로벌 시장과 정반대로 혈장 유래 제품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글로벌 투자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는 중국 시장 분석 보고서에서 중국 인구 100만명당 혈우병 치료제 투여량이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 비해 현격히 낮아 장기적으로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중국 내 A형 혈우병 환자가 미국보다 3배 가까이 많은 5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허은철 녹십자 사장은 “급변하는 글로벌 시장 상황, 투자 효율성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전략적 판단을 내렸다”면서 “현실적으로 공략이 가능한 시장에 집중하고 차별화된 후속 약물 개발을 가속화 시키는데 주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