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석 SLMS(Secret Lab of Mad Scientist) 대표
지난 연재까지는 스타틴으로 대표되는 고콜레스테롤증을 대처하기 위한 약제들이 어떤 연구과정을 통하여 개발되었고, 2차 대전 이후 심혈관질환 감소에 어떻게 기여하였으며, 마침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는 약으로 대두되는 과정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심장질환과 함께 눈에 띄게 사망율이 줄어든 것은 바로 뇌졸중(Stroke)이다. 그림 1의 1900년부터 2015년까지의 미국의 주요 사망율 변화 추세에서 심장질환과 함께 사망율이 급격히 감소한 것은 바로 뇌졸중이다. 즉, 심장질환이나 뇌졸중 등의 순환기 질환에서의 사망율이 눈에 띄게 감소한 것이 바로 20세기 후반 의학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을 가능케 한 요인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 요인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고혈압(hypertension)이 이러한 질환에 대한 위험요소라는 것을 파악하고, 고혈압을 약물로써 제어하게 된 것이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고혈압을 제어하는 여러가지 약물들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이와 더불어, 혈압 조절과 혈액순환 관련 치료법을 찾고자 하던 와중에서 발견된 부작용(?)이 계기가 되어 발견된 발기부전치료제의 역사도 같이 알아보도록 한다.
일단 혈압조절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인류가 언제부터 ‘혈압’ 과 질병과의 관계를 인지했는지, 아니, 그것보다 먼저 언제부터 인류가 혈액의 순환에 대한 현재의 상식을 확립했는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혈액 순환의 발견의 역사
심장에서 동맥을 통해서 온 몸의 모세혈관까지 퍼져나간 혈액은 다시 정맥을 통하여 심장으로 되돌아오고, 폐를 거쳐서 신선한 산소를 받아서 다시 심장으로 되돌아와 다시 동맥을 타고 온 몸으로 퍼져나간다는 것은 중고등학교 과학 과목에서도 배우는 현대인의 상식으로 통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은 언제부터 ‘상식’이 되었을까?
고대 로마시절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혈액에 대한 지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로마제국 시절의 의학자인 클라우디우스 갈레노스(Claudius Galenos,130-210)이었다. 갈레노스는 동물 해부를 통하여 얻은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고대 의학의 바탕이 되는 혈액의 생성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였다. 갈레노스의 혈액 생성 이론은 혈액은 음식을 재료로 하여 간에서 생성되며, 간에서 정맥으로 이동한 후 정맥을 따라서 몸 전역으로 퍼져서 사용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심장으로 이동하여 심장의 우심실로 들어가고 불순물들은 폐에서 밖으로 배출되며, 불순물이 제거된 혈액은 심실 사이에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하여 좌심실로 이동하고, 폐정맥에서 얻은 공기에서 얻은 생명 정기를 받아 동맥으로 전해져서 온 몸으로 퍼진다는 이론이었다[1].
즉,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혈액이 말초혈관을 통하여 순환된다는 상식이 아닌, 간에서 만들어진 혈액이 온몸의 말초에서 소모된다는 일방통행적인 모델이었다. 그리고 심장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듯이 혈액을 온 몸에 보내는 펌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파도처럼 들어왔다 빠지는 혈액이 머무르는 장소에 불과했었다.
사실 심장에는 갈레노스의 이론처럼 우심실에서 좌심실로 혈액이 이동하는 작은 구멍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심장을 해부해보면 알 수 있었던 일일지도 모르지만 인체 해부를 금기시하던 갈레노스의 시대에 이를 입증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사체의 해부를 통하여 동적인 혈액의 흐름을 정확히 알아내는 것 역시 무리였을 것이다.
이러한 갈레노스의 이론은 무려 1400년간 고대 의학의 근간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갈레노스의 이론에 의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천년 넘게 도그마로 군림하던 갈레노스의 이론이 대체되기 위해서는 일단 해부학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인체해부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안드레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1564)가 일했던 이탈리아의 파도바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인체 해부에 의한 인간 생리의 탐구가 시작되면서 혈액 순환의 기전이 밝혀질 토대가 놓여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해부학적인 탐구에 기반하여 우리에게 현재 상식으로 통하는 혈액의 순환이론을 제시한 사람은 당시에는 의학의 변방인 영국 출신이던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다. 그는 당시 해부학을 비롯한 의학의 메카였던 파도바 대학에 유학하여 연구를 시작하였다.
하비는 사체와 동물의 해부를 통하여 정맥에는 판막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갈레노스의 이론대로라면 간에서 생성된 혈액은 정맥을 통하여 말초로 퍼지게 된다. 그러나 정맥에 존재하는 판막은 혈액을 항상 심장 쪽으로 흐르게 만들 것이며, 그 반대로 심장에서 말초로 퍼지는 것은 막을 것이다. 여기서 갈레노스의 이론과의 괴리가 발생한다. 이어서 그는 심장이 단순한 혈액이 들어찼다가 빠지는 ‘중간 거류지’ 가 아닌 심장 근육이 수축하여 혈액을 내보내는 펌프의 역할을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심장의 맥박과 심장의 용량을 감안하여 심장에서 얼마나 많은 양의 혈액이 나오는지를 계산했다. 만약 갈레노스의 이론대로라면 모든 혈액은 간에서 음식물에 의해서 생성되므로 생성되는 혈액의 양은 섭취되는 음식물의 양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예측한 혈액의 맥박수와 심장의 용량을 통혜 예상한 혈액의 양은 약 297리터로써 이는 인간의 체중보다 훨씬 큰 용량이 되므로 결과적으로 혈액이 일회용으로 소모된다는 갈레노스의 이론은 타당하지 않으며, 혈액은 순환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이를 결정적으로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철사로 팔목을 묶는 실험을 통하여 혈액이 동맥에서 정맥으로 순환한다는 것을 보였다. 일단 그는 팔을 묶어 동맥과 정맥의 흐름을 차단하자, 팔은 더이상 혈액이 들어가지 않아 차가워지고, 철사 밖의 동맥은 부풀어올랐다. 그다음 철사를 느슨하게 하여 동맥에 혈액을 통하게 두고, 정맥은 여전히 막힌 채로 만들자, 팔 안으로 혈액이 순환되어 팔이 따뜻해졌고, 철사 안의 정맥이 부풀어올라서 혈액이 동맥에서 정맥으로 흐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비는 50세가 되던 1628년 그동안의 연구를 집대성한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De motu cordis)라는 책을 통하여 혈액이 신체를 순환하고, 심장은 펌프의 역할을 하여 동맥으로 혈액을 펌프질하며, 말초를 거쳐 정맥으로 심장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혈액의 순환에 대한 최초의 이론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하비의 혈액 순환에 대한 이론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혈액 순환의 근간이 됨과 동시에 하비는 사실상 근대 생리학의 창시자가 되었다[2].
혈압계의 발명과 혈압의 측정
하비의 혈액 순환에 대한 발견 이후 과연 혈관 중의 혈액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에 대한 정량적인 측정이 이루어진 것은 하비의 혈액 순환 이론이 발표된 지 1세기 이상이 지나서였다. 영국의 성직자 스테판 헤일즈(Stephen Hale)은 1733년 말의 동맥에 유리관을 삽입하여 혈액이 치솟는 높이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최초로 동물의 동맥의 혈압을 측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침습적인 방법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진단 등에 이용되기에는 너무나도 불편했다.
현대적인 혈압계에 근접한 기구(sphygmomanometer)는 오스트리아의 의사인 사무엘 지크프리드 칼 폰 바슈(Samuel Siegfried Karl von Basch, 1837-1905)에 의해서 발명되었다. 그의 기구는 동맥을 압박하는 압박대의 압력을 수은으로 측정하는 기구로써 오늘날의 혈압계에서 수축기 혈압(systolic pressure) 만을 측정할 수 있는 기구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오늘날의 혈압계의 전신이 되는 청진 혈압계는 러시아의 의사 니콜라이 코로트코프(Nikolai Korotkov, 1874-1920)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코로트코프는 팔을 두른 압박대에 압력을 주어 팔의 혈관 흐름을 막은 다음 조금씩 압력을 빼면서 들려오는 일련의 음향을 통해서 수축기 혈압에 해당하는 압력과 이완기 혈압에 해당하는 압력의 위치를 아는 테크닉을 개발하였다. 이렇게 개발된 청진 혈압계의 등장 이후에 마침내 비침습적으로 수축기와 이완기 혈압을 비교적 정확하고 간편하게 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혈압과 질병과의 연관성은 그리 쉽게 대두되지 않았다 오늘날 고혈압에서 오는 대표적인 2차 증상인 만성신장염과 심근 비대와의 연관성은 1836년 영국의 의사 리차드 브라이트(Richard Bright, 1789-1858)에 의해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브라이트는 이러한 만성/급성 신장염을 브라이트병(Bright’s diseases)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언뜻 관련이 없어 보이는 신장염과 심근 비대가 같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서 브라이트는 뚜렷한 설명을 하지 못하였다. 최초로 높은 혈압이 이러한 두 가지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은 사무엘 윌크스(Samuel Wilks, 1824-1911)였다.
코로트코프의 청진 혈압계 등장 이후 혈압 측정이 간편하게 수행될 수 있게 됨으로써 개인간의 혈압의 차이가 존재함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혈압이라는 의미의 ‘본태성 고혈압’(Essential Hypertension)이라는 용어는 1911년 독일의 의사 프랭크 에베하트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다.
고혈압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
그러나 20세기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고혈압이 질병의 위험요소라는 생각은 의학계 내에서 확립된 생각은 아니었다[3]. 즉 고혈압은 혈액 순환을 위해서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종의 보상 기전이며, 혈압을 내리는 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 의학계의 주류의 주장이었다. 가령 1931년도에 저명한 심장외과인 리버풀 대학의 존 헤이 (John Hay)는 이렇게 BMJ에 기고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고혈압이 인간에게 큰 위협이 된다는 것은 그 발견 자체에 있다. 어떤 멍청이는 틀림없이 혈압을 내리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4]
저명한 심장외과의인 폴 더들리 화이트(Paul Dudley White) 역시 1930년대에 저술된 교과서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고혈압은 중요한 보상 메커니즘으로써, 우리가 이를 확실히 조절할 수 있더라도 이것을 손대서는 안된다”[5]
그러나 고혈압의 위험성을 의학계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알리게 된 계기는 1945년 4월의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델러노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의 사망이다. 그는 1945년 뇌졸중으로 요즘 기준으로는 그닥 고령은 아닌 6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런데 그의 의료기록을 살펴보면 오늘날 기준으로는 악성 고혈압으로 분류될 수준의 매우 높은 고혈압이 관찰되고 몇번의 심장 이상 역시 기록되었다[6]. 죽기 1년 전인 1944년에는 수축기 혈압이 180-230mmHg, 이완기가 110-140mmHg 로 기록되었고, 몇 달 후인 4선 대통령에 당선될 때는 200/100mmHg, 사망하기 두 달 전의 1945년 2월의 얄타 정상회담에서는 s 260/150mmHg 이 기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혈압을 대단한 위험 요소로 취급하지 않았던 당시의 의료 관행상 그는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았다. 그의 주치의는 그의 혈압에 대해서 “그와 비슷한 연령의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정상적인 수준”이라고 평가하였다. 물론 그 당시에는 고혈압에 대한 특별한 관리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가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대통령이 임기 중 병사한 것과 함께 심장질환, 뇌졸중 등의 순환기계 질환의 사망율이 미국인의 사망율의 1, 2위를 차지한 것은 심혈관 질환에 대한 대중적인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1948년 루즈벨트의 후임인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은 ‘국가 심장 법안’(National Heart Act)라는 법안에 서명하였다. 이 법안에서는 미국인이 고혈압을 포함한 심혈관 질환으로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으며, 미국인의 1/3이 관련질환에 의해서 사망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의 예방, 진단, 치료를 하기 위한 수단을 개발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20년에 걸친 심장 관련 역학조사를 위하여 50만 달러의 예산을 책정하였으며, 오늘날 NIH 산하의 국립 심장, 폐, 혈액 연구소(National Heart, Lung and Blood Institute, National Institute of Health)가 되는 국립 심장 연구소(National Heart Institute)의 설립이 이루어지게 된다.
프라밍햄 심장 연구 (Framingham Heart Study)
1948년의 국가 심장 법안에 의해서 과연 심혈관 질환의 위험요소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역학 조사의 대상으로 선정된 곳은 보스턴 인근에 있는 메사추세츠의 소도시인 프라밍햄(Framingham, ME)이었다. 프라밍햄이 대상으로 선정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단 많은 심혈관 관련 연구자들이 있는 하버드 의대와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있고, 당시 28,000명의 중산층 거주자들이 존재하는 이 소도시가 1940년대의 전형적인 미국을 대표하는 곳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이었다[7].
최초의 코호트는 28세에서 62세에 이르는 5209명의 거주자였고, 코호트의 절반 정도는 여성이었다. 코호트의 구성원들은 최초에 정밀 신체검사와 라이프스타일에 관련한 설문을 받았고, 2년에서 6년 간격으로 이들의 의료기록과 건강 관련 지표를 검사받았다.
이 연구의 최초의 결과는 연구가 시작된지 거의 10년이 지나서 발표되었다. 160/95 mmHg 을 고혈압의 기준으로 할때, 고혈압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서 관상동맥 심장질환의 발생 빈도가 4배 정도 높다는 것이 확인되었다[8]. 그리고 고혈압과 뇌졸중이 큰 연관관계가 있음이 역시 밝혀졌다[9]. 그렇다면 수축기 혈압과 이완기 혈압 중 어떤 지표가 심혈관 질환의 발생과 좀 더 밀접한 관련이 있을까? 1971년 프라밍햄 코호트를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남성과 여성 공히 이완기 혈압보다는 높은 수축기 혈압이 심혈관 질환의 발생과 관련있다는 결과를 얻었다[10].
1971년 5192명의 프라밍햄 코호트 중 울혈성 심부전(Congestive heart failure)이 발생한 142명에 대한 역학 조사 연구가 발표되었다[11]. 과연 울혈성 심부전이 발생한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요인들은 무엇일까? 울혈성 심부전이 발생한 환자 중에서 75%이 고혈압(160/95mmHg 이상의 혈압) 이었음이 밝혀졌다. 관상동맥질환(Coronary artery disease)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39%이었으나, 이 중 29%는 고혈압 환자이고, 고혈압이 아닌 관상동맥질환 환자 중에서 울혈성 심부전이 발생한 환자는 10%에 불과했다. 그리고 울혈성 심부전이 발생한 이후 5년 이내에 사망한 사람은 남성의 62%와 여성의 42%이었다. 이것은 고혈압이 울혈성 심부전의 확실한 위험 요소(Risk factor)임을 보여주는 결과로써, 혈압 관리의 중요성을 증거 기반으로 입증한 좋은 사례이다.
원래 계획한 20년간의 추적 연구가 끝난 이후 이 연구를 종료할지, 유지할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 연구를 주도한 연구자들은 이 연구를 연방 정부의 지원 없이도 유지하기 위하여 민간으로부터의 후원을 받으려는 캠페인을 시작하였지만, NIH에서는 연구를 계획대로 종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971년 당시 미국 대통령인 닉슨 행정부의 개입으로 프라밍햄 연구는 계속하게 되었고, 1971년부터 최초의 코호트의 자녀에 해당하는 5,124명에 대한 추적 조사가 시작되었다. 2002년에는 원래 코호트의 3세대에 해당하는 추적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즉 1948년부터 시작된 연구가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프라밍햄 심장 연구는 이러한 질환의 위험 요소를 알아내기 위한 최초의 장기간의 역학 연구로써 후속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혈압 조절이 심혈관 질환과 뇌졸중 발생에 필수적이라는 가장 큰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다.
다음 연재에서는 실제로 혈압 조절을 위한 여러가지 의학적 수단의 개발 과정을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1. 윤태욱. (2012). 윌리엄 하비의 해부학적 연구와 자연철학. 연세의사학, 15(1), 7-47.
2. Whitteridge, G. (1971). William Harvey and the Circulation of the Blood (p. 240). London: Macdonald.
3. Moser, M. (2006). Historical perspectives on the management of hypertension. The Journal of Clinical Hypertension, 8, 15-20.
4. Hay, J. (1931). A British Medical Association Lecture on the significance of a raised blood pressure. British medical journal, 2(3679), 43.
5. White PD. Heart Disease. 2nd ed. New York, NY: MacMillan Co; 1937:326.
6. Bruenn, H. G. (1970). Clinical notes on the illness and death of President Franklin D. Roosevelt. Annals of internal medicine, 72(4), 579-591.
7. Mahmood, S. S., Levy, D., Vasan, R. S., & Wang, T. J. (2014). The Framingham Heart Study and the epidemiology of cardiovascular disease: a historical perspective. The lancet, 383(9921), 999-1008.
8. Dawber, T. R., Moore, F. E., & Mann, G. V. (1957). Coronary heart disease in the Framingham study. Am J Public Health Nations Health, 47(4), 4-24
9. Kannel, W. B., Dawber, T. R., McNamara, P. M., & Cohen, M. E. (1965). Vascular disease of the brain—epidemiologic aspects: The Framingham study. Am J Public Health Nations Health, 55(9), 1355-1366.
10. Kannel, W. B., Gordon, T., & Schwartz, M. J. (1971). Systolic versus diastolic blood pressure and risk of coronary heart disease. The American Journal of Cardiology, 27(4), 335–346. doi:10.1016/0002-9149(71)90428-0
11. McKee, P. A., Castelli, W. P., McNamara, P. M., & Kannel, W. B. (1971). The natural history of congestive heart failure: the Framingham study.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285(26), 1441-1446.